어린 시절의 단상 (45) 썸네일형 리스트형 토끼사냥의 추억 나는 어린시절 한곳에 오래 정착하여 살지 못하고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이곳저곳 옮겨 가며 살았다. 그래도 가장 오래 머물러 살던 곳이 양구군 동면 지석리 고인돌 마을이다. 이곳에서 만 3년간(1960.4-1963.4,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2학년)을 살았다. 나에게 고향처럼 생각되는 곳이 고.. 중학생 상대 사진 촬영 할인권 사기 판매 사건 "벼룩이 간을 내먹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런 속담에 딱 들어맞는 사건이 필자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 발생하였다. 아마 중3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양구 읍내에 사진관이 여러개 있었다. 기억나는 것은 중학교 졸업 앨범을 제작하였던 서라벌사진관과 은하사진관 두곳이다. .. 초등학교 5학년 소년들이 헤어지며 한 우정의 맹세 단기 4294년(1961년) 3월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다.(이 때는 4월 1일이 새학기 시작) 양구 광덕 초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5학년이 되던 '60년 4월에 원당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에 다니던 광덕 초등학교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가 방한길(지금 서울에서 장로교회 목사로 목회)이었다. 양구 .. 양양군 현북면 산골 분교장 시절 1957년 10월 아버지께서 갑자기 전근이 되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교장선생님과의 갈등 때문이었다고 한다. 속초의 설악국민학교(지금의 온정초등학교)에서 근무하셨는 데 전임 김교진 교장선생님과는 원만한 관계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교진 교장선생님이 전근을 가시고 김*수 교장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는 데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갈등이 생기고 교장선생님은 아버지를 산골 분교장으로 좌천시켰다. 10월 초순 산판에서 쓰는 트럭이던 제무시를 타고 현북면 장리에 있는 현성국민학교 장리분교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태어난지 6개월 정도 된 동생을 안고 앞 좌석에 타신 것 같고 우리는 적재함에 타고 양양부터는 골짜기 개울을 따라 난 길을 덜컹대며 목적지로 향했다. 도착한 것은 밤중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 어린시절의 단상 - 야설(야한 소설) 이야기 우리들 모두 사춘기를 겪었다. 개구리 올챙이때 생각을 못한다고 사춘기때의 호기심과 갈등을 까맣게 잊고들 살았을 것이다. 사춘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性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게 마련이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사춘기가 온다고도 하지만 우리가.. 추억 속의 가설극장 내가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1,2학년때로 기억된다. 두편의 영화가 기억나는 데 한번은 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한 것이다. 아마 계몽영화였던 것 같은 데 기생충에 대한 위생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른 한편은 아버지를 따라 속초의 어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었는 데 내 .. 중학교 졸업앨범을 보며 생각나는 추억들 1962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았는 데 시험은 1961년 12월에 치르었다. 체력검사의 총점대비 비중이 굉장히 높았는 데 추위에 떨며 체력검사를 하였다. 5.16 군사혁명후 첫 초등학교 졸업생과 중학교 입학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어린시절의 단상 - 삐라에 얽힌 추억 타의에 의해 분단되었지만 분단된 남과 북은 동족이지만 어느 적대국보다 더 치열하게 싸웠다. 어른들에게 들은 6.25 이야기인데 미군이나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힌 인민군이나 국군은 살았지만 국군이나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같은 동족끼리 더 적대감을 가지고 싸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남과 북은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상대방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치열한 심리전을 전개했다. 대적 방송이나 삐라 살포 등은 이러한 심리전의 한 수단이었다. 휴전선에서 가까운 양구지역에는 북한에서 보낸 많은 삐라가 떨어졌다. 학교에서는 북한에서 보낸 삐라를 주으면 읽지 말고 파출소나 학교에 신고를 하라고 했다. 필자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반에 삐라를 신고한.. 이전 1 2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