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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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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넘어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벼락공부 습관 ‘세 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 속담이 있다.오늘 비를 맞으며 급하게 미루어 두었던 배수로 작업을 하면서 학교에 다닐 때 벼락공부를 하던 생각이 났다.오늘 번개 불에 콩을 구워먹듯 급하게 한 배수로 작업은 내 생활 속에서 생소한 것이 아닌 과거 내 살아온 과정 속에서 나타났던 생활 형태가 반복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수로 작업은 원래 해마다 해오던 것인 데 언젠가부터 하지 않았고 작년과 재작년 두 번에 걸쳐 하우스로 물이 넘쳐 흘렀다. 그러나 다른 일에 순위가 밀려 차일피일 밀리다가 올해로 넘어오게 되었다.금년에도 배수로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밭갈 준비를 하고 두둑을 만들고 종자나 모종을 심고 농약 비료를 주는 작업을 하며 배수로 작업은 뒤로 밀리곤 했다.더욱이 관절염으로 무릎..
1964학년도 중학교 졸업앨범, 그후 필자가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62년이다. 당시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다. 대부분 6.25때 1-3세였던 우리 동기들은 전쟁 중 유아사망율이 높아 숫자가 많지 않았다. 덕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경쟁율의 덕을 보았다. 적은 수만 탈락되고 대부분이 합격의..
1956년과 2016년(낙산사 의상대에서) 내가 처음으로 낙산사에 가본 것은 1956년 늦은 봄이었던 것 같다. 그해 봄에 결혼하신 사촌형님 내외분이 속초에 살던 우리집을 방문하셨다. 우리 가족들과 사촌형님 내외분이 속초 항과 낙산사 등을 관광하였는 데 오래된 일이라 기억에 남는 것은 속초등대와 낙산사를 가본 것 뿐이다. ..
퇴직후의 나의 삶의 모습 필자가 어렸을 때인 ‘60년대 초반 ‘인생은 40부터’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10대 초반의 어렸을 때 40세면 굉장히 나이가 많은 어른으로 생각했다. 마흔살이 되면 마을에서 원로 대우를 받았다. 50세면 대부분이 손주를 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50세가 되면 힘든 농사일에서 벗어나 모내기때 쟁기질, 못줄 잡는 일, 모를 찌는 일 등 힘이 덜드는 전문적인 일을 했다. 여자들은 손주를 돌보는 일 등 가사일을 하였다. 이 시대에는 50대가 되면 힘든 농사일과 노동에서 한발 물러나 자식들의 부양을 받는 노후생활에 들어갔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환갑을 넘긴 분들은 드물었다. 환갑잔치는 결혼식 피로연 못지 않은 큰 행사였다. 古稀를 넘기면 장수(長壽)했다고 하였다. 평균수..
우리나라 최초의 주민등록증 한곳에 정착하여 살지 못하고 이동이 빈번하며 복잡한 사회관계망 속에서 사는 현대인에게 자기 자신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은 필수적이다.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전통사회는 이동이 제한적이고 대부분이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평생을 생활하여 서로를..
대학입학 자격 예비고사, 수학능력 시험과 대학입시 변천 오늘이(2014. 11. 13)이 수학능력시험일이다. 오늘도 예의 입시 한파가 닥쳤다. 수학능력 시험 실시의 뉴스를 보면서 예전에 대학입학 자격 예비고사를 보던 생각이 났다. 필자의 자식들도 수능을 거쳐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입시는 대를 이어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큰 짐이 되고 있다. 우리..
책은 꿈을 키우고 시골에서 자란 우리 세대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우리 또래는 교과서외의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자랐다. 휴전이 되고 3년이 채 못된 1956년도 초등학교 입학생인 우리 또래들은 그래도 지붕 밑에서 공부할 수 있어 피난지 학교에서 천막이나 나무 밑에서 공부를 했다는 선배들보다는 호..
평범한 소시민의 사는 이야기 중학교때 수학을 가르치셨던 이영래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기억된다. 선생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렸을 때는 거창한 꿈을 갖는다고 하셨다. 반세기 전인 중학교 시절 어린이들이나 소년들이 가진 꿈은 오늘날과는 달리 정말 거창한 것들이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되겠다거나 육군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