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 속담이 있다.
오늘 비를 맞으며 급하게 미루어 두었던 배수로 작업을 하면서 학교에 다닐 때 벼락공부를 하던 생각이 났다.
오늘 번개 불에 콩을 구워먹듯 급하게 한 배수로 작업은 내 생활 속에서 생소한 것이 아닌 과거 내 살아온 과정 속에서 나타났던 생활 형태가 반복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수로 작업은 원래 해마다 해오던 것인 데 언젠가부터 하지 않았고 작년과 재작년 두 번에 걸쳐 하우스로 물이 넘쳐 흘렀다.
그러나 다른 일에 순위가 밀려 차일피일 밀리다가 올해로 넘어오게 되었다.
금년에도 배수로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밭갈 준비를 하고 두둑을 만들고 종자나 모종을 심고 농약 비료를 주는 작업을 하며 배수로 작업은 뒤로 밀리곤 했다.
더욱이 관절염으로 무릎이 아픈 후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며칠 전 일기예보를 보니 장마가 진다고 했다.
배수로 공사는 급하게 되었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올해 물이 하우스로 넘쳐들어오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다행히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하우스 안의 고랑을 타고 내려가 오히려 물을 공급해 주어서 그후 저수지에서 내려가는 수로에 물이 공급되지 않았을 때도 가뭄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착한 越流였다. 그러나 올해에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리라 장담할 수 없다.
물이 넘쳐 흐름을 방지하기 위해 배수로 바닥을 높이고 둑을 높혀야 한다
그런데 장마가 시작된 어제까지도 배수로 작업은 손을 대지 못했다.
오늘 100미리 가까운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아니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더 미룰 수가 없었다. 무릎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에 배수로 작업을 시작했다.
비를 맞아가며 일을 시작했다. 먼저 배수로에 나있는 풀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낫으로 풀을 베내고 곡삽으로 바닥을 팠다.
삽으로 판 흙을 둑에 쌓았다. 풀을 제거하고 바닥을 파고 파낸 흙으로 둑을 높이는 작업을 했다. 다행히 비가 와서 흙이 잘 파졌고 돌이 없어 파기기 쉬웠다.
무릎이 아파서 의자를 가져다 놓고 작업을 했다. 서거나 구부리고 하는 작업을 최소화하며 일을 했다.
비가 거세게 내렸다. 입은 우비도 비를 막기 어려웠고 풀에 걸려 우비가 찢어지기도 했다.
세 번을 쉬어가며 일을 했다. 9시 반에 시작한 일은 1시가 넘어 끝났다. 몇 년간 미루었던 일이 단시간에 완수되었다. 이 시간에는 아픈 무릎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직 일에만 집중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온 삶의 과정도 오늘 배수로 작업과 비슷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다닐 때 시험공부는 벼락공부가 기본이었다. 평소 공부를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시험에 임박해서 시험준비를 하는 것이다.
초인적인 능력이 나오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한 시간이 걸려도 외워지지 않던 내용이 10분이면 핵심 내용이 암기가 되었다. 벼락공부 치고는 그런대고 성적이 잘 나온 편이었다.
대학원 시절 리포트를 쓰는 것도 제출 기일에 임박해서 작성을 했다. 졸업논문 작성은 더했다.
입학 후 한학기 정도 지나니 졸업논문 준비 이야기가 나왔다. 교육 대학원이라 방학 중에 수강을 하여야 하니 졸업 논문은 더욱 근심이 되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지도교수와 상담하여 논문 주제를 선정하여 행정사항을 충족시켰다.
그러나 어떻게 논문을 써야될지는 막막했다.
평소에는 출근을 하고 수업을 하고 업무를 처리해야 하니 일에 진척이 없었다.
시간만 흘러갔다. 지도교수와 의논하고 후배가 소개해 준 환경학과의 전상호 교수님의 조언을 받아 논문 작성의 방향과 포함할 내용 등의 틀을 잡았다.
학교 도서관, 교육개발원 등에서 자료를 수집하였다. 금상첨화인 것은 고려대 도서관에 근무하는 고교 동창 김찬구 군의 협조로 유엔환경계획(UNEP)의 자료를 접하고 이곳에서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논문 작성 계획과 방향 포함할 내용의 윤곽이 정해지고 참고 자료까지는 수집하는 등 준비는 마쳤으나 집필은 계속 미루어졌다. 중간 점검을 받을 날이 다가왔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목마른 자가 샘을 판다고 했다.
논문 작성 조언을 하여 준 전상호 교수를 찾아갔더니 서론을 먼저 써오라고 했다.
전교수는 서론을 쓰는 것이 논문의 절반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몇 번을 만나 지도를 받고 서론을 잘 썼다고 합격 판정을 받았다. 서론에서 시간을 잡아먹다 보니 이어지는 본론 결론을 작성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교에 출근하여 수업을 해야 하고. 논문 제출 기일은 얼마 남지 않고.
방법은 잠을 줄이는 것밖에 없었다. 벼락 시험공부를 할 때처럼 학교에서 퇴근하면 논문 작성에 매달렸다.
아마 두달 정도를 그렇게 지낸 것 같다. 제출 기일에 가까스로 맞추어 논문을 제출했고 다행히 심사에 통과되었다.
그후 과학작품 제출, 현장 연구 논문 작성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반복되었다.
논문이나 작품 제출 신청. 승인. 작성. 제출 등의 순서를 밟는 데 신청을 하고 학교 일등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제출 마감일에 임박해서야 논문이나 과학작품 작성을 했다.
물론 사전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마감 3-4주 정도를 남겨놓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 기간 안에 논문을 완성하거나 실험을 해서 데이터를 얻고 분석하고 정리하고 보고서를 완성하였다.
승진에 필요해서 몇 번을 제출했는 데 매번 비슷한 현상이 반복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배수로 작업도 생소한 것이 아닌 내 삶의 익숙한 유형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 기한이 다 되어 급하게 서두른 습관의 연장선 상에 있었던 것이 오늘 배수로 작업이었다.
마감 시간에 쫒겨 작성한 리포트나 논문 보고서 등이 나중에 보면 그럴 듯 하고, 내가 어떻게 짧은 시간에 저런 걸작(?)을 만들었나 내 자신을 감탄시켰는 데 배수로 작업을 서두른 오늘도 똑같은 현상이 반복된 것이다.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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