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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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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순 엄마와 머슴 강씨 금순 엄마는 나이가 20대 후반이었고 어린 내가 보기에도 얼굴이 예쁜 편이었다.초등학교 1학년 다니는 딸이 있었는 데 딸의 이름이 금순이어서 ' 금순 엄마'로 불렸다.금순이에게는 남동생도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금순이네 집은 우리집에서 신작로를 건너 가서 있었다. 금순이 아버지는 서른 여섯살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금순이 아버지는 우리가 지석리로 갔을 때 환자였다. 아마 위암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장병이라고 했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을 보면 암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일반인들은 암이라는 병을 알지도 못했던 시절이니까...학교에서 돌아다가, 아니면 밖에 나가 놀다가 보이는 금순 아버지는 항상 창백하고 힘이 없는 모습이었다.얼굴은 누렇게 병색이 완연하였고 몸이 바싹 말라 있었다..
삐라에 얽힌 추억 타의에 의해 분단되었지만 분단된 남과 북은 동족이지만 어느 적대국보다 더 치열하게 싸웠다. 어른들에게 들은 6.25 이야기인데 미군이나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힌 인민군이나 국군은 살았지만 국군이나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같은 동족끼리 더 적대감을 가지고 싸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남과 북은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상대방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치열한 심리전을 전개했다. 대적 방송이나 삐라 살포 등은 이러한 심리전의 한 수단이었다. 휴전선에서 가까운 양구지역에는 북한에서 보낸 많은 삐라가 떨어졌다. 학교에서는 북한에서 보낸 삐라를 주으면 읽지 말고 파출소나 학교에 신고를 하라고 했다. 필자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반에 삐라를 신고한..
맛의 기억 사람마다 음식에 대한 기호가 다르다. 어떤 음식을 좋와한다는 것은 그 음식이 맛이 있기 때문이다. 건강이나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아닌 한 좋와하는 음식에 끌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좋와하는 음식이나 맛이 어려서 경험한 맛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에 가서 살아도 김치 맛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특정 지역 사람들이 특정 음식을 좋와하는 것은 이러한 공통의 경험이 밑받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좋와하는 음식이 있고 맛이 있다. 필자가 좋와하는 음식의 경우 어려서 자주 먹었던 음식이거나 특별히 맛이 있었다고 기억되는 음식이다. 대부분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다. 장떡, 돌나물 김치, 달래 간장, 질경이 볶음, 콩탕 등은 내가 좋와하는 음식이다. 어머니가 별세하고 안 계시..
인분(人糞)더미에 빠지고, 부주의하였다고 혼나고 필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60년대 초반 농가에서는 인분을 비료로 많이 사용하였다 화학비료만 사용하는 경우 땅이 산성화되고 유기물 함량이 줄어 척박해지는 등 (당시에는 유안-황산암모늄 비료를 많이 사용) 지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유기질 비료를 사용해야 한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시판되는 퇴비가 없었기 때문에 농가가 자가생산한 퇴비를 사용해야 했다. 山野에서 퇴비(풀을 벤 것)와 가축을 기르며 나온 두엄이 가장 좋은 유기질 비료였으나 변소에서 나오는 분뇨도 빼놓을 수 없는 유기질 비료였다. 농가마다 돼지 우리나 닭장 소 외양간에서 나오는 두엄을 쌓아두는 더미가 있었다. 봄이 되면 두엄더미에서 두엄을 논이나 밭으로 옮겨서 지력을 높히는 데 사용했다. 인분의 경우는 밭으로 내는 방법이 두엄과는 좀 달랐..
"나를 따르라" - 군 훈련 차량의 칸보이 행열과 군용차에 대한 추억 초등학교 3학년때인 '58년에 양구로 전학을 왔다. 양구는 전에 살던 속초나 양양 현북면 장리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속초도 시내에서 좀 떨어진 당시에는 한산했던 설악국민학교(현재 온정초등학교) 옆에서 살았고, 양양 남대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강가에 형성된 마을이던 장리라는 ..
아홉살 초등학교 3학년 시절(1958년) 1958년 6월 상순 아버지의 전근관계로 양양군 현북면 장리를 떠나 양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당시 현북면 장리는 버스도 안다니고 남대천을 따라 난 도로로 어쩌다가 산판트럭이나 다니는 교통오지였다.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산에는 나무가 우거진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었다. 강으로 ..
얼음을 깨고 계곡물에서 발씼기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위생상태는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형편이 없었다. 우선 대부분의 가정에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목욕탕이 있는 집은 시골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얄개전'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인 나두수의 집(아버지가 ..
조기회(早起會) 이야기 조기회(早起會)의 사전적 뜻은 "한동네 사람끼리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함께 운동, 청소 따위를 하기 위해 조직한 모임"이다. 요즈음은 조기 축구나 배드민턴 등 아침운동을 하는 동호회에서 사용하는 명칭이 되어 있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1956-1962) 여름방학때는 마을별로 조기회가 조직되어 있어 아침 일찍 마을 공터에 모여서 출석점검을 하고 보건체조를 한후 헤어졌다. 초등학교 3-4학년 이상이면 의무적으로 조기회를 참석해야 했다. 선생님이 점검을 오신다고 했는 데 선생님이 오신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때 양구군 남면 적리라는 곳에서 광덕 초등학교를 다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매일 아침 조기회가 실시되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침 6시에 모였을 것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