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순 엄마는 나이가 20대 후반이었고 어린 내가 보기에도 얼굴이 예쁜 편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다니는 딸이 있었는 데 딸의 이름이 금순이어서 ' 금순 엄마'로 불렸다.
금순이에게는 남동생도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금순이네 집은 우리집에서 신작로를 건너 가서 있었다. 금순이 아버지는 서른 여섯살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금순이 아버지는 우리가 지석리로 갔을 때 환자였다. 아마 위암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장병이라고 했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을 보면 암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일반인들은 암이라는 병을 알지도 못했던 시절이니까...
학교에서 돌아다가, 아니면 밖에 나가 놀다가 보이는 금순 아버지는 항상 창백하고 힘이 없는 모습이었다.
얼굴은 누렇게 병색이 완연하였고 몸이 바싹 말라 있었다. 해가 잘 비치는 곳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이 금순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60년 이른 여름이었다. 금순이네 집에서 큰 굿이 벌어졌다. 불치의 병을 고칠 길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한 것이다. 3일간 큰 굿판이 벌어졌다. 무당과 몇명의 조수들이 와서 큰 굿을 하였다.
꽹가리와 장구 소리가 나고 무당은 칼을 들고 춤을 추며 무어라 외치곤 하였다.
나는 굿을 구경하다가 싫증이 나면 다른 곳에서 놀다가 다시 구경을 하곤 하였다.
무당이 칼을 들고 칼춤을 추다가 자기 얼굴에 칼을 댈 때는 아찔하기도 하였다. 작두를 타기도 한 것 같은 데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 날인가 무당이 금순 아버지에 대한 미래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몇 살에는 어떻고, 몇 살에는 어떻고...." 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듣는 금순이 아버지나 어머니나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삼일간 동리를 떠들석하게 하던 굿판은 끝이 났다.
여름은 가고 가을이 되었다. 무당의 예언과는 달리 금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삼일장인지 오일장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금순아버지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아마 학교를 등교하기 전인지 아니면 일요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상여가 출발한 것은 아침때였다. 전통 양식의 상여에 금순아버지의 관을 실을 때였다. 소복을 한 금순이 어머니가 슬피 울며 관위에 엎드렸다. 통곡을 하며 무어라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장의 슬픔을 쏟아내는 통곡을 하였다. 상여에 관을 실으려 하자 금순 엄마는 몸으로 관을 누르며 손으로 관을 잡고 있어서 관을 옮길 수가 없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금순엄마를 위로하며 억지로 관에서 떼어 놓고 나서야 관을 상여에 실을 수가 있었다.
상여가 떠나자 금순엄마는 상여를 잡고 따라가며 소쩍새처럼 구슬피 울었다. 동리 아주머니나 할머니들도 모두 따라서 눈물을 훔쳤다. 보고 있는 아이들도 울지 않는 애들이 없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몸부림치는 금순엄마를 붙잡았고, 상여는 몸부림치며 우는 금순엄마를 뒤로 하고 묘지로 향하였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금순 엄마는 한동안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이 마을에 떠돌았다. 금순 엄마마가 한동네 머슴 강씨와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
강씨 아저씨는 고인돌 마을에서 가장 부자집인 조한묵씨네 머슴이었다. 강씨의 나이는 스물아홉인가로 금순엄마와 같은 나이였다. 이북에서 월남하였다고 하는 데 아마 단신 월남을 하여 아무 연고자가 없었는지 조한묵씨 집에서 머슴을 살고 있었다. 조한묵씨댁에는 머슴이 두명인가 있었다. 조한묵씨는 당시 30대 중반인 분으로 약간 뚱뚱한 체격의 몸집이었다. 우리 어머니와는 동성동본으로 조카벌이 되어 우리집과도 가깝게 지냈다.
조한묵씨네 머슴방은 동네 청년들의 놀음방이었다. 4.19가 나고 5.16이 나기 전해인 '60년도 촌에서는 화투가 대유행이었다. 나이롱뻥과 섰다, 짓구땡이라는 것을 주로 했다. 우리 마을의 조돈*이라는 청년은 화투에 열중했는 데 자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장땡이다. 장땡이다"라고 외쳤다고 해서 이 소문이 온 동네네에 퍼져서 마을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어느 날 머슴 강씨의 사랑방에서 판이 벌어졌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지서 순경들이 나와서 강씨네 방에서 하는 놀음판을 덮쳤다고 한다. 그런데 같이 놀음을 하던 강씨는 아랫목에 누워서 자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순경들이 강씨를 발로 차며 깨우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연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순경들이 "응 이 새끼는 자고 있었구나..."라고 하면서 강씨를 제외한 다른 꾼들만 잡아 갔다고 한다.
다음 다음해 봄인가 금순 엄마와 강씨가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금순네 식구들과 강씨가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일년 후 우리집이 지석리를 떠나는 달엔가 금순엄마가 마을에 나타났다. 혼자가 아니고 아기를 업고 왔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아마 땅과 집을 정리하러 왔을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우리집도 고인돌 마을에서 양구 쪽으로 10km 쯤 되는 창리 마산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어 그후 금순이네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부지런하고 임기응변에 능한 강씨였으니 금순엄마와 같이 잘 살았으리라.
청년시절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남편의 관을 붙잡고 슬피 울면서 관에서 떨어지지 않던 금순 엄마였는 데 2년이 채 되지 안아 강씨와 새살림을 차리다니...그리고, 강씨 아저씨의 아기를 낳아 업고 온 것이 참 이상했다.
그렇지만 나 역시 결혼을 하고 중년의 나이가 되면서 금순엄마가 이해가 되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이고 서른 살 젊은 과부가 혼자 살기에는 너무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동네에서 늘 보았을 얼굴이 넙적하고 시커멓고 튼튼하게 생긴 강씨가 믿음직 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머슴살이를 하는 강씨 역시 북에서 혈혈단신으로 내려려와 의지할 곳이 없는 형편에 과부가 된 금순 엄마를 내심 흠모하였을 것이다. 아픈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며 잘살았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고통이라 하여도 아름다운 추억이다. 금순 엄마와 머슴 강씨에 대한 유년의 기억들이 한편의 드라마 같은 생각이 든다. 금순이도 이제 50대 중년이 되었을 것이고 강씨 아저씨와 금순 엄마 사이에서 난 아기도 마흔일곱 살쯤 되었을 것이다.
나 또한,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 큰 손녀의 말대로 나이를 뱉어 버릴 수도 없고, 그저 세월이 덧없이 빠름을 실감할 뿐이다.
2009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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