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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인분(人糞)더미에 빠지고, 부주의하였다고 혼나고

필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60년대 초반 농가에서는 인분을 비료로 많이 사용하였다

화학비료만 사용하는 경우 땅이 산성화되고 유기물 함량이 줄어 척박해지는 등 (당시에는 유안-황산암모늄 비료를 많이 사용) 지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유기질 비료를 사용해야 한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시판되는 퇴비가 없었기 때문에 농가가 자가생산한 퇴비를 사용해야 했다.

山野에서 퇴비(풀을 벤 것)와 가축을 기르며 나온 두엄이 가장 좋은 유기질 비료였으나 변소에서 나오는 분뇨도 빼놓을 수 없는 유기질 비료였다.

농가마다 돼지 우리나 닭장 소 외양간에서 나오는 두엄을 쌓아두는 더미가 있었다.

봄이 되면 두엄더미에서 두엄을 논이나 밭으로 옮겨서 지력을 높히는 데 사용했다.

 

인분의 경우는 밭으로 내는 방법이 두엄과는 좀 달랐다.

두엄을 퍼내는 데는 쇠스랑이 쓰였다면 인분을 푸는 데는 바가지와 인분을 담을 통이 필요했다.

당시 시골의 변소(화장실)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한가지는 분뇨를 모으는 통이 없이 걸터앉을 돌이나 나무틀을 만들어 놓고 땅위에 대변을 보아 이것을 변소 한 편에 모아놓은 잿더미(나무를 때고 나오는 재를 모아두는 곳) 위에 던지고 재와 섞어서 처리하는 방법이다.

다른 한가지는 드럼통 등을 놓고 그 위에 발판을 놓아 대소변이 통안에 낙하하도록 하여 일정량이 모이면 퍼내는 방법이었다,

규모가 큰 경우는 분뇨 수거통을 우차나 손수레 등에 싣고 가 논밭에 시비하였지만 작은 경우 X통이라고 부르는 통을 물지게처럼 지고 가거나 손잡이에 긴 막대를 끼워서 둘이 맞들어 밭에까지 운반하였다.

농작물의 생육시기와 비료를 주는 시기가 맞으면 직접 농작물에게 주었으나 분뇨를 주는 시기가 아니면 퍼낸 분뇨를 밭 이나 밭에 가까운 공한지에 모아서 보관했다.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놀던 활동량이 많던 시절 이런 인분더미 옆을 지나가려면 독한 냄새에 코를 막고 지나가야 했다.

봄 - 가을에는 분뇨더미에서 냄새가 나고 모아둔 곳이 보이기 때문에 분뇨더미에 빠진다거나 하는 사고는 나지 않았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늦가을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겨울에 대비해서 분뇨통을 비워두느라 분뇨를 밭으로 퍼냈고, 즉시 사용되지 않는 분뇨는 밭 한구석에 쌓여있게 마련이었다.

겨울이 되어 얼면 분뇨더미는 딱딱하게 굳어지게 된다.

그 위에 눈이 덮히면 분뇨더미인지 밭인지 구별이 되지 않게 된다.

또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아 분뇨더미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도 없게 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겨울이었다.

초겨울이었는지 아니면 겨울이 끝나가는 이른봄이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특별히 놀 곳이 없었던 우리 또래들은 산과 들이 놀이터였다.

하루는 친구들과 밭을 가로질러 이동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발이 허벅지까지 푹빠지는 것이었다.

발을 빼고 보니 인분더미를 밟은 것이었다.

겉만 살짝 얼은 인분더미 위에 눈이 살짝 덮혀 주변과 구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들은 x 밟았다고 소리를 지르며 코를 막고 나를 피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주변의 눈을 긁어 모아 바지 가랭이를 닦아내고 개울로 갔다.

발이 시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양말을 벗고 발을 얼음을 깬 물에 씼고 신던 고무신도 물로 씼었다.

분뇨가 묻은 바지 가랭이도 물로 닦아내었다.

바지 가랭이가 금방 얼어서 서걱거렸고 발이 시린 것을 억지로 참아가며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자 내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부주의하게 덤벙대다가 X더미에 빠졌다고 꾸중을 하셨다.

그리고 바지와 내복을 벗으라고 하시고 옷을 빨으셨다.

단벌신사인지라 옷이 마를 때까지는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어야 했다.

 

당시에는 내가 부주의해서 X더미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성하여 생각을 해보니 X더미에 빠진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눈이 덮혀 주변과 구별할 수 없는 곳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겠는가?

또 그곳에 X더미가 있다는 것을 신통력이 없는 6학년 소년이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뇨를 저장하고 아무런 안전 조치도 취하지 않은 농부가 책임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농부 역시 통상적으로

그렇게 분뇨를 처리해왔던 것이기에 그를 부주의하다만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필자나 그 농부나 모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을 뿐이다.

 

두 세대가 지난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농촌에도 대부분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여 분뇨를 퍼내는 재래식 화장실을 보기 힘들어졌다.

또 행사장 등에 임시로 이동식 화장실이 설치되어도 장비를 이용하여 분뇨를 수거해 가 처리를 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분뇨를 야적하여 방치하는 일도 없어졌다.

지금 세대는 생각할 수 없는 옛날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하는 사건이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내가 운나쁜 피해자였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