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6월 상순 아버지의 전근관계로 양양군 현북면 장리를 떠나 양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당시 현북면 장리는 버스도 안다니고 남대천을 따라 난 도로로 어쩌다가 산판트럭이나 다니는 교통오지였다.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산에는 나무가 우거진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었다.
강으로 흘러드는 계곡 하천은 물 반 고기 반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족대를 가지고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당시 나는 체구가 작고 몸이 약하였었다.
상급생들이 이런 선생님의 아들을 위해 강에서 칠성장어를 잡아다 주었다.
어머니는 이것을 석쇠에 구워서 나에게 주셨는 데 기름기가 많고 맛이 좋왔다.
학교 친구들이 은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도 은어를 잡는 데를 가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양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부자리와 약간의 옷과 취사에 필요한 기구가 살림의 전부였다.
전년도 가을 이사를 올 때 산판에 다니는 트럭을 타고 왔는 데 이번에는 등짐으로 이삿짐을 날랐다.
상급생 몇명과 같은 3학년이던 대하(나보다 다섯살 위)가 지게에 짐을 지고 양양읍까지 갔다.
이부자리를 제외한 짐들은 포장을 하여 분유통에 넣어 운반했다.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업고, 아버지는 네살된 여동생을 업고, 나와 밑의 여동생은 걸어서 양양읍까지 갔다.
들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우리 식구 여섯과 짐을 진 학생들 몇을 합해서 모두 10여명이 대열을 이루어 양양읍까지 걸어 가는 데
모내기를 하는 분들이 모밥을 먹고 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해서인지 사양을 하고 양양읍까지 갔다.
짐을 지고 온 학생들은 돌아가고, 짐을 어떻게 양구까지 보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식구들은 버스를 타고 양구를 향했다.
양양에서 출발하여 속초를 거쳐(환승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음) 간성으로 해서 진부령을 넘고 원통과 인제를 거쳐
양구 광치고개를 넘는 길이었다.
광치고개를 넘던 일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굽이굽이 커브를 돌아 고개를 넘는 데 밑을 보면 천길만길 낭떨어지기였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광치고개를 넘어 구암리에서 내렸다.
광덕국민학교에 딸린 관사에서 며칠을 보내고 가오작리에 마련된 집으로 가서 정착을 하였다.
가오작리라는 마을이었는 데 50호가 넘는 꽤 큰 마을이었다.
물론 대부분이 농사를 짓는 농가였다.
이 마을에서 양구읍 쪽으로 나는 도로를 따라 20분쯤 가면 광치라는 마을이 있었는 데
원통으로 가는 도로와 양구로 가는 도로가 교차하는 곳에 광치 검문소가 있었다.
광치에서 인제 원통으로 가는 길은 광치 계곡을 따라 가다가 큰 고개를 넘어 원통으로 갔다.
개울을 건너면 양짓말이라는 마을이 있었는 데 호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학교(광덕국민학교)는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가 되는 곳에 있었는 데 적리라는 연대본부 앞에 있는 마을과 가오작리 사이에
있었다.
가오작리 마을과 학교 사이에는 비석거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비석이 있는 전작이 있어 생긴 마을 명칭으로 가오작리에 속하였다.
한국전쟁때 전장이 되어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는 데 비석이 있는 전각이 유일하게 파괴를 면하고 남아있는 건물이었다.
광덕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50명-200명 정도의 작은 학교였고 우리반은 20명 정도였다.
인원이 적어 두개 학년이 복식수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먼저 다녔던 분교는 초가지붕의 학교에 마루도 깔지 못한 흙바닥에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높은 것은 책상 낮은 것은 걸상으로 만든
책걸상에서 공부하였다.
전학을 온 광덕 초등학교는 함석 지붕을 한 건물로 초가지붕은 아니었다.
또 흙바닥이 아닌 마루바닥으로 학교와 교실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책걸상이 없었어 마루바닥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수업을 받았다.
어떤 아이들은 개인용 낮은 책상을 가지고 와서 사용하기도 했다.
책걸상은 가을 운동회를 하지 않고 마련한 예산을 보태서 마련하였다.
초등학교 6년 중 3학년때만 운동회를 하지 않았다.
성장발달 단계로 보아 친구들과 떼를 지어 놀러다니는 시기였다.
함께 어울린 동무들은 같은 마을과 윗마을인 비석거리의 애들이었다.
광치와 적리에 사는 애들은 거리 관계로 방과후에 어울리는 친구들은 아니었다.
함께 어울린 패거리들은 나, 한길, 하섭, 완하, 호병, 정호, 장하 등이었다.
놀이터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산과 들이 우리의 놀이터였다.
우리 패거리들은 함께 산과 들로 몰려다니며 놀았다.
골목대장은 한길이었다.
한창 더울 때는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였다.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는 구체적인 놀이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뱀을 잡는 것이 중요한 놀이의 하나였다.
뱀은 사람을 물면 사람이 죽기도 하는 나쁜 동물이기 때문에 보이는대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 산과 들에는 뱀이 많았다.
뱀이 눈에 띄면 대장 한길이의 사격 명령에 따라 뱀을 향하여 돌을 던졌다.
뱀이 돌에 맞아 잘 움직이지 못하면 돌격 명령에 따라 나무 작대기로 뱀을 때려잡았다.
죽은 뱀이 밤에 흙냄새를 맡으면 살아나서 복수를 한다고 해서 토막을 내서 묻었다.
술을 먹인다고 하며 뱀이 묻힌 곳에 오줌을 누는 것으로 뱀사냥은 마무리가 되었다.
1958년은 휴전이 되고 민간인들이 입주한지 5년차가 되던 해였다.
산과 들에는 전쟁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산에는 폭탄이 눈에 띄기도 했고, 골짜기 논에는 거꾸로 박힌 큰 폭탄이 눈에 띄기도 했다.
큰 산에 가면 해골이 있다고 했다. 산에서 해골을 보았다는 애들도 있었다.
또 큰 산에는 문둥이들이 있어 아이들을 붙잡아다가 간을 빼먹는다고 했다.
우리는 해골과 문둥이가 무서워서 큰 산에는 가지를 못했다.
아마 큰 산에는 불발탄 등이 있어 위험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애들이 가지 못하도록 겁을 주느라
문둥이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한번은 야산에서 놀다가 사태가 난 곳에서 사람의 뼈로 보이는 뼈를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을 친 적도 있었다.
어른들과 같이 개울에서 족대로 물고기를 잡다가 실탄이 끼워져 있는 기관총 탄창을 줏기도 했다.
다음해 봄의 일이지만 큰 산불이 났었다.
산에서는 폭발물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아마 전쟁때 사용되었던 불발탄이나 지뢰가 터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집에서 학교로 가는 중간에 사격장이 있었다.
학교로 가는 도로 오른 편에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위병소가 도로가에 있었는 데 장교들이 탄 찝차가 지날 때마다 초병은 벼락치는 소리를 지르며 경례를 했다.
이 도로 건너서 사격장이 있었다.
사격장 이름은 용매 사격장이었다.
도로에 인접한 곳에 발사장소가 있었고 사격장에 인접하여 논이 있었고 개울 건너에 과녘이 있었다.
사격이 있는 날에는 군인들이 실탄의 발사방향의 통행을 통제하였다.
사격이 끝나면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납을 캐러 간다고 하며 과녘판 부근의 흙에는 총알에 들어있던 납이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흙 속에서 납을 골라낸 후 이것을 모아 녹여서 만든 납덩이를 팔았다.
나도 처음에는 납을 캐는 데 따라갔었으나 부모님이 이를 아시고 사격장 부근에는 가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셔서 납을 캐러
가지는 않았다.
전방지역이라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행군하는 모습, 산과 들에서 훈련하는 모습들이 목격되었고,
때로는 비포장도로에 먼지를 날리며 이동하는 끝없는 차량의 행렬과 굉음을 내며 이동하는 탱크들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해 가을 큰 트럭이 엄청나게 큰 폭탄을 싣고 지나가기도 하였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미국에서 들여온 미사일을 싣고 시위를 한 것이라고 했다.
가을이 되면서 뇌염이 유행하였다.
선생님은 뇌염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모기에 물려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연막소독 차가 하얀 연기를 뿜어대며 마을에 와서 수시로 소독을 했고 우리는 연막소독차를 따라다녔다.
학교가 휴교를 하였다. 꽤 오랜동안 휴교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양구까지 뇌염이 유행하지는 않았다.
1958년의 뇌염은 전국에서 1900명의 사망자를 냈고 치사율이 30%에 가까운 사상 최악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우리 패거리의 대장이었던 한길이는 재주꾼이었다.
어디서 파이프를 구해 초총을 만들었다.
나무를 깎아 총신을 만들고 고무줄로 격발장치를 만들었다.
양초로 탄환을 만들어 판매하는 화약을 사서 여러개를 겹쳐서 초를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겨 격발을 시켰는 데 굉음을 내며
양초가 발사되었다.
방한길이는 새집을 잘맡았는 데 황조롱이 새끼를 잡아다가 올챙이 미꾸라지 등의 먹이를 먹여 길러서 날게 되면 날려 보내기도 하였다.
늦가을이었다. 선생님이 방한길이가 써서 제출한 동시가 전국단위에서 입상하였다고 하셨다.
신문에 한길이의 이름과 더불어 한길이가 쓴 시가 실렸다.
한길이는 상장과 푸짐한 상품을 받아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시골학교에서 전국단위의 공모행사에서 입상하였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방한길이는 목사가 되어 평생 목회를 하고 은퇴를 앞두고 있다.
작년에 어느 문학지에 시부문에 등단을 하여 작가가 되었다.
전국단위 공모행사에서 입선한 후 60년만에 늦깎기로 작가가 된 것이다.
담임이시던 성락영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성선생님이 군인교회를 다니셨는 데 많은 아이들이 교회를 나갔다.
겨울방학이 가까와지자 선생님은 성탄절 노래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다.
나는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해서 교회에 나가지를 않았다.
성탄절이 되자 교회에서 성탄행사를 했는 데 어린이들이 중심이 된 행사였다.
이 행사는 마을 행사가 되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어른들도 구경을 갔다.
애들이 연습을 하는 소리가 교회밖에서도 들렸다.
어떻게 하는지 보고싶은 호기심이 있었지만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아 예배든 행사때는 교회에 가지를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성탄절 새벽에 과자 등을 준비하였다가 새벽송을 돌러온 팀에게 주셨고
성탄 전야 행사때 동생을 업고 구경을 가시기도 하였다.
학교에 등교할 때 애들은 책보에 책을 싸가지고 등교했다.
남자 아이들은 책이 든 쪽을 등에 짊어지고 배쪽에 끈을 매고 걸어갔다.
뛰거나 하면 필통에 든 연필이 흔들려 소리가 나기도 하였다.
여자 아이들은 책보를 가슴 쪽을 향하게 하여 팔에 끼고 조신스럽게 걸어 다녔다.
겨울에는 산과 들로 뛰어 다니는 대신 운동장에서 몸을 움직이는 놀이를 주로 하였다.
여자애들은 줄넘기를 많이 하였고, 남자 애들은 말타기 진뺐기 제기차기 자치기 공차기 호무라(변형된 야구경기)
가이상(금을 그어 안과 밖을 나누고 금밖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등이 주된 놀이였다.
그때로부터 60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렀다.
금요일 양구에 사는 중학교 동기가 부친상을 당하여 문상을 가서 아홉살 때 친구인 하섭, 돈수, 완하 장하를 만났다.
얼마 전 한길이와 통화를 하다가 시인으로 등단한 소식을 들었다.
몇몇은 어려서 헤진 후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60년도 더된 어린 시절에 만난 친구들 평생 길동무가 되어 지금도 교류가 이어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다.
나의 아홉살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은 시골학교에 다니며 또래들과 함께 산과 들로 누비고 다니고 운동장에서
뛰노는 현대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연상태에서 자란 자연 속의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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