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위생상태는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형편이 없었다.
우선 대부분의 가정에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목욕탕이 있는 집은 시골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얄개전'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인 나두수의 집(아버지가 대학교수)에 목욕탕이 있었는 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집안에 목욕탕이 있다니?
읍내에 공중목욕탕이 있기는 했지만 읍내에서 몇십리 떨어져 사는 시골 오지 주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대부분의 농가가 그렇듯이 변소는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고
부엌은 방과 벽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부엌은 난방이 되지 않아 겨울에는 한데 와 다름이 없었다.
또한 부엌에서 취사와 난방이 이루어졌고, 비좁아서 부엌에서 세수를 하기가 어려웠다.
아이들은 대부분 부엌에서 대야에 더운물을 떠다가 마당에서 세수를 했다.
당시 강원도 영서 지방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
아침 7-8시에 마당에서 세수를 한다는 것은 추위 속에서 세수를 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세수를 하려니 상의를 벗어야 한다.
때로는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세수를 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얼굴에 물이나 찍어 바라는 식의 고양이 세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가려고 문고리를 잡으면 추위에 손이 철제 문고리에 달라붙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농촌 아이들은 목에 때가 끼고, 손등에도 때가 끼고 손등이 트기도 하였다.
발과 몸을 씻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또한 이를 닦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치약이 없어 소금으로 이를 닦았지만 이것도 어쩌다가 닦는 것이어서 이를 닦으면 잇몸에서는 피가 났다.
대두분의 아이들은 충치가 있었다.
부모님이 아이들 용의에 신경을 쓰는 집은 가끔씩 강제로라도 머리를 감기고 발을 씼기기도 하였지만 여러명의 아이들이 북적대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다.
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를 감지 못하였고, 손등과 발등에는 때가 끼고 손등이 터지고 얼굴은 버짐이 생겨 있었다.
또한 입고 있는 옷도 남루했고 누덕누덕 기운 흔적이 있거나 오랫동안 빨지를 않아 후줄근하였다.
학교에서는 용의 검사라는 것을 했다.
선생님이 용의 검사가 있다고 예고를 하면 아이들은 집에서 더운물에 손과 발을 오랫동안 담그고 나서 손과 발을 씻었다.
때를 불리기 위해서다.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않아 손등과 발등의 때는 국수처럼 밀려 나왔다.
아침에는 오랜만에 이를 닦으니 잇몸에서는 피가 나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찌든 누런 이가 희게 되기는 어려웠디.
용의 검사 시간에 선생님은 양말을 벗은 한쪽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손등을 펴라고 지시하였다.
손등과 발등에 때가 끼어 시커먼 녀석들에게 선생님은 까마귀가 '형님'이라고 부르며 날아간다고 말씀하셨다.
손과 발과 목에 때가 낀 녀석들은 회초리로 손등을 맞거나 벌을 서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 직전의 일로(1959년) 기억된다.
선생님이 용의 검사를 하셨는 데 남학생 대부분이 용의 불량에 해당되었고 필자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선생님은 당장 학교 뒤 계곡물에 가서 발을 씻고 오라고 엄명을 내리셨다.
선생님의 명령은 지엄하신 것이라 거역할 수 없었다.
또래들은 할 수 없이 학교 뒤 계곡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계곡물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다. 얼음을 깨고 발을 씻으려고 물에 발을 담갔다.
발이 시린 것은 당연지사.
어느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뜨거워! 이이고 뜨거워!"
발을 씻으러 온 녀석들은 모두 뜨겁다고 소리를 지르며 손에 잡히는 표면이 매끄러운 돌로 손등과 발등을 문질러 댔다.
때가 쉽게 벗겨질 리가 없었다.
돌멩이로 문지른 손등과 발등은 빨갛게 충혈되었고 피가 나기도 하였다.
아무리 문질러도 때가 골고루 벗겨질 수가 없었다.
한참 손등과 발등을 돌멩이로 문지르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교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그런 우리들의 손과 발을 더 이상 검사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수업을 받게 하셨다.
세월이 흘러 큰 손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까르륵 거리며 웃었다.
두 세대를 지난 손녀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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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언 계곡물에서 얼음을 깨고 손발을 씻던 사건이 나고 15년이 지나 필자가 중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들 앞에 섰다.
1주일에 한 번씩 용의 검사를 하는 날이 있었다.
이때에도('70년대 중반) 대부분의 농촌주거 환경은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을 뿐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와 주거환경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남학생들이라 용의가 불량한(?) 녀석들이 많았다.
겨울에는 특히 그러했다.
이를 닦지 않아 이가 누렇거나 손등에 시커멓게 때가 끼고 갈라진 녀석들이 많았다.
나는 은사님들에게 전수받은 대로 용의 검사를 하고 불량한 녀석들에게 벌을 주었다.
벌은 청소를 하는 것이었다.
적발된 녀석들에게 청소를 시키면 청소를 하지 않게 된 그날 당번 녀석들은 좋아서 입이 귀밑까지 벌어졌다.
손과 발을 제대로 씻지 못하던 시절에 목욕을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여름에는 개울이 놀이터여서 매일같이 몸을 씻었지만 가을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면서 개울가와 멀어지게 되면 자연히 몸을 씻는 일도 중단이 되었다.
손발을 씻는 것도 힘든 데 온몸을 씻는다는 것을 꿈을 꾸기도 힘들었다.
자연 다음 해 여름이 되기까지 전신을 물에 담그는 일은 중단되게 되었다.
전신 목욕을 하는 것은 신체검사 때문이었다.
신체검사 전날은 물을 데워 온몸을 씻느라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 남학생들은 가슴둘레와 몸무게를 잴 때 웃통을 벗고 측정을 하였다.
이때 몸에 때가 있으면 검사를 맡은 선생님은 손바닥으로 등을 후려갈렸다.
필자가 교사가 되어서도 어려서 배운 일을 반복하였다.
등이나 배에 때가 낀 녀석들은 손바닥으로 등짝을 맞아야 했다.
'80년대가 되면서부터 주거환경이 개선되고 새로운 주택에는 목욕시설이 생기게 되고
가정당 자녀의 수가 적어지면서 아이들의 위생상태는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90년대부터는 더 이상 용의 검사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 이상 이를 닦지 않아 치아가 누렇거나 손등과 발등에 시커멓게 때가 끼고 튼 아이들은 찾기가 어러워졌다.
복장 검사나 소지품 검사 등은 있었지만 이것도 2000년대가 되어 학생인권에 대한 의식이 신장되면서부터 사라져 갔다.
이제 용의 검사에 대한 기억은 이를 겪었던 세대의 '그때 그 시대'의 화석화된 추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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