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린 시절의 단상

"나를 따르라" - 군 훈련 차량의 칸보이 행열과 군용차에 대한 추억

초등학교 3학년때인 '58년에 양구로 전학을 왔다.

양구는 전에 살던 속초나 양양 현북면 장리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속초도 시내에서 좀 떨어진 당시에는 한산했던 설악국민학교(현재 온정초등학교) 옆에서 살았고,

양양 남대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강가에 형성된 마을이던 장리라는 곳은 당시에는 자동차를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양구군 남면 가오작리로 이사를 오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가오작리에서 학교(광덕초등학교)에 가려면 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학교를 가는 동안 군인차가 수시로 지나다녔다.

도로를 지나는 군용차량은 트럭, 찝차, 스리쿼터가 주였고 아주 가끔은 탱크나 장갑차가 지나갈 때가 있었다.

버스는 하루 7차례 정도(아침에는 1시간 간격, 그후에는 2시간 간격) 있었고 드물게 민간 화물트럭이 지나갔다.

차량이 적던  시절이니 군용차가 다니지 않으면 도로는 아주 한산하였다.

당시의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양구에서 동면까지 가는 도로가 완전히 포장된 것은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가 되어서였을 것이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양구 읍내와 읍내에서 4-6km 떨어진 도촌리와 선착장까지만 포장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용차량은 수시로 지나다녔는 데 보급품을 실은 트럭이 가장 많이 다녔던 것 같다.

훈련때에는 트럭이 군인들을 실어날랐는 데 이때에는 앞에 찝차가 갔다.

운전교육을 하는 차량은 대열을 지어서 이동했다.

맨 앞차에는 "나를 따르라"라는 구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몇대인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20대 정도가 대열을 지어 이동했던 것 같다.

주로 트럭이었는 데 한대에 두명이 타고 있었다.

한명은 교육생이었고 한명은 교관이었을 것이다.

당시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차가 가면 먼지가 날렸다.

가물 때는 더하였다.

차가 달리면 뒤에서는 달리는 차는 보이지 않고 먼지만 보였다.

앞에서 보면 구름같은 먼지가 달리는 차를 따라왔다.

대열을 지은 군용차가 지나가면 도로는 짙은 연막을 친 것처럼 보였다.

군용차 행렬의 맨 뒤에는 폐쇄라는 팻말을 붙인 차량이 가거나

우리들이 달아올리는 차라  부르던 레카차가 따라갔다.

우리는 군 훈련차량의 대열이 다가오면 먼지가 날리지 않는 곳으로 피하였다가 먼지가 가라앉은 후 길을 갔다.


중학교 1학년때 버스통학을 하였다.

먼지가 많이 날리는 때에 군용차 행렬을 만나면 더운 여름에도 창문을 닫아야 했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이라 버스안은 한증막이 되었다.

군용차량 행렬이 다 지나가고 먼지가 가라앉아야 다시 창문을 열 수가 있었다.


때로는 적십자 표시를 한 앰불런스가 이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경우는 아마도 급한 환자를 이송할 때였을 것이다.

몇번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하얀 천으로 싼 상자를 안은 군인을 태운 영현이라는 표시를 한 찝차가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 훈련 중에 사망한 군인을 화장한 유골을 국립묘지로 이송하는 차량이었을 것이다.

백차라고 하는 헌병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병사들을 태우고 이동하는 군용차를 선두에서 인솔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군을 태운 차량이 이동하는 경우 장군 탑승 차량에는 별판이 부착되었고 헌병 백차가 사이렌을 불며 앞서 갔다.

외출을 나와서 가게 앞에서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던 군인들은 사이렌 소리가 나면 신속하게 어디론가 숨었다.


훈련으로 이동하는 차가 아닌 보급품을 싣고 가는 차량이나 대열을 짓지 않고 한 두대가 이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경우 아가씨들이 지나가면 군인들은 아가씨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고 몸짓을 하며 히야까시(놀림아러는 뜻의 일본어)라는 것을 했다.

이 경우 아가씨들은 머리를 숙이고 군인들의 시선을 피해서 걸어갔다.

때로는 아가씨를 향하여 무나 배추 꽁치 등 보급품을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버스통학을 할 때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에는 학교에서 집까지 10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가는 경우가 있었다.

주로 날씨가 좋은 봄과 가을에 걸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토요일이라 도시락을 가지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점심을 먹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차비를 아끼기 위해서거나 단체관람을 한 경우 차비로 입장료를 냈기 때문에 걸어가야 했다.

양구읍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하리에 검문소가 있었다.

우리는 검문소에서 근무하는 헌병에게 다가가서 말을 붙였다.

헌병은 우리에게 누나가 있느냐고 물었다.

넉살 좋은 녀석들은 누나가 있고 19세라고 했다. 소개를 시킬 용의도 있다고 했다.

근무하는 헌병은 우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우리와 방향이 같은 빈 트럭이 오면 세워서 태워주었다.

우리들은 빈 군용트럭 적재함에 타고서 집에까지 편안하게 갔다.

대부분의 경우 헌병들의 배려로 토요일 오후에는 군용트럭을 타고 갔으나 아주 가끔은 차를 얻어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근무하는 헌병이 원칙론자이거나 아니면 훈련기간 등 사정이 있어서 트럭을 태워주지 않는 경우였다.


이럴때 우리들은 부득이 걸어가야 했다.

토요일 오후 점심을 거르고 2시간을 넘게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상도로라는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갔다.

늦가을이거나 초겨울 날이었다.

토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고 영화관람을 한 후 읍내에서 놀다가 늦게 군인차를 얻어타기 위해 검문소로 갔다.

이날따라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헌병은 차를 태워주지 않았다.

차비가 없는 우리는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짧아져서 집에 도착하기 전에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며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캄캄해서야 집에 도착했다.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으니 어머니는 초조하게 기다리셨을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꾸중을 하셨다.

아마 눈깜짝할 사이에 저녁밥을 먹었을 것이다.

===========================================================================


1996년 9월 동해안 강릉지역 해안에 북한군 잠수함이 좌초된 사건이 일어났다.

잠수함 승조원과 특수훈련을 받은 무장간첩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을 하였다.

그러나 승조원들은 집단 자살을 하거나 사살되고 1명은 생포되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무장공비는 북으로 도주를 시도하였고 군은 병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근무지인 양구에서 춘천으로 오는 길이었다.

반대 차선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군용트럭의 행렬이 무장한 군인들을 싣고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수의 군용차가 이동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홍천 서석에서 근무하였다.

서석에서 홍천까지 가는 전구간은 아니지만 일부 구간이 군인들 훈련용 차량이 다니는 구간과 겹쳤다.

홍천으로 갈 때 가끔은 훈련용 차량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보통 20-30대의 군용차량이 대열을 지어 이동했다.

대열의 모습은 어렸을 때 본 모습과 동일하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도 차를 운전하여 도로위를 달린다는 것이다.

훈련을 하는 군용차는 천천히 이동을 하였다.

예전에는 이동하는 군차량을 민간차량이 추월하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민주화가 된 후에는 이런 제약이 없었다.

일정 속력 이상으로 달리지 못하고 서행하는 군용차량을 추월해 갈 수 있었다.

문제는 여러대가 대열을 짓는 경우 모든 차를 추월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겹치는 구간이 적기 때문에 군용차는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여 오래 지체되는 경우는 없었다.


홍천군 교육청에서 회의가 있어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있었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학교에서 출발을 했는 데 얼마 가지 않아 훈련 차량 행렬을 만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열의 구조가 전과 달랐다.

주로 트럭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는 데 트럭 외에 버스, 승용차, 트럭들이 뒤섞인 구조였다.

차량 숫자도 통상적인 경우보다 많았다. 모두를 추월할 수 없었다.

그래도 중간에 길이 갈라지는 곳에 이르면 다른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에 갈림길에서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내가 가려는 홍천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날 훈련은 평소와 다른 목적의 훈련이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시속 20-30km의 느린 속도로 훈련차량 대열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인제에서 홍천으로 오는 4차선 국도와 만나는 곳에 이르러서야 정상속도로 갈 수가 있었다.

여유시간을 계산하고 학교에서 출발하였는 데 이날은 훈련 차량때문에 지체가 되어 회의가 시작된 후에야 교육청에 도착하였디.


춘천 시내에서 거주하는 지금 많은 수의 군용차량이 이동하는 것을 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외곽 도로에서 군용차량을 목격하는 때가 있는 데 이럴 때마다 어린시절 전방지역에 거주할 때 군용차량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