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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양양군 현북면 산골 분교장 시절

1957년 10월 아버지께서 갑자기 전근이 되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교장선생님과의 갈등 때문이었다고 한다.

속초의 설악국민학교(지금의 온정초등학교)에서 근무하셨는 데 전임 김교진 교장선생님과는 원만한 관계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교진 교장선생님이 전근을 가시고 김*수 교장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는 데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갈등이 생기고 교장선생님은 아버지를 산골 분교장으로 좌천시켰다.

 

10월 초순 산판에서 쓰는 트럭이던 제무시를 타고 현북면 장리에 있는 현성국민학교 장리분교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태어난지 6개월 정도 된 동생을 안고 앞 좌석에 타신 것 같고 우리는 적재함에 타고 양양부터는 골짜기 개울을 따라

난 길을 덜컹대며 목적지로 향했다.

도착한 것은 밤중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위를 돌아본 나는 실망이 컸다.

학교 지붕이 초가였다. 흙벽을 하였고 바닥은 마루가 없는 흙바닥이었다.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벤치 모양의 상을 만들었는 데 높은 쪽은 책상, 낮은 쪽은 의자로 다섯명 정도가 같이 사용했다.

전교생이 50여명이었는 데 6학년은 본교인 현성국민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분교에는 1-5학년이 공부를 했다.

선생님은 아버지를 포함해서 두분이었다.

교실이 두개여서 두반으로 나뉜 복식수업을 하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선생님은 과제를 주고 다른 학년을 수업하셨을 것이다.

우리 학년은 5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두명의 동기생 이름만 기억이 나는 데 이 기억을 토대로 2003년 1월 동창생 한명을 만났다.

나보다 다섯살이 위여서 그 자리에서 형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가끔 전화를 주고 받는 데 작년에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산골이었는 데 조금만 나가면 개울이 흘렀다.

나는 가끔 개울가에 가서 놀았다.

혼자 놀 때는 모래 장난을 하기도 하고 돌로 성을 쌓는 등 상상의 세계를 만들기도 하였다.

학교에서 몇 발자국 나가면 남대천이라는 큰 개울이 흘렀다. 개울 건너에는 부소치라는 마을이었는 데

참나무 껍질을 벗겨 만들었다는 굴피로 지붕을 이은 집이 많았다.

굴피집은 멀리서 보면 기와집처럼 보였다.

 

아마 겨울철의 일로 기억된다.

마을의 어른이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같이 문상을 갔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몇 사람이 모여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이었다.

교회에 가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생소한 광경으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왔다.

가끔 아버지와 나는 족대를 가지고 남대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고기가 아주 많아서 족대를 대고 발이나 막대로 돌이나 수초를 교란시키면 족대에 물고기가 많이 잡혔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물고기를 잡을 때면 신이 났었다.

잡히는 물고기 중에는 머리부터 몸으로 이어지는 양측면에 구멍이 일곱개씩 나있는 칠성장어라는 물고기도 있었다.

칠성장어를 구워 먹으면 맛이 좋았는 데 구멍이 있는 머리부분은 버리고 아래부분만 먹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가 맹장염(수술을 안하는 만성)에 걸리셨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차편도 없고 가끔 산판차만 들어오는 곳이었다.

어쩌다가 차가 들어 오면 우리들은 신기한 듯 차 주변에 모여서 구경을 했었다.

이런 곳이니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갈 수도 없었다.

학교 아저씨가 아버지를 업고 양양 병원까지 가셨다고 했다.

 

아마 5월 초쯤의 일로 기억된다.

개울가 절벽에 어떤 분이 실족사를 했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사고가 난 곳을 향해 갔다. 무서워서 가까이는 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았다.

흰 옷을 입은 분이 절벽 밑에 앉은 자세로 있었다.

순경들이 나와서 전신주에 전화를 연결해서 무어라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분은 잔치집에 가서 술을 드시고 캄캄한 밤에 집으로 가시다가 절벽에서 실족하였다고 했다.

 

어느날 우리 집에 땅꾼이 왔다.

그는 뱀을 많이 잡아가지고 왔는 데 우리집 마루에 뱀을 쏟아 놓았다.

뱀들이 기어 다니고. 땅군은 뱀을 가지고 목도리도 하고 허리띠도 하면서 장난을 했다.

땅꾼이 어머니에게 능구렁이 한마리를 드리겠다고 했다.

지난 겨울에 먹을 것이 없어 동냥을 왔었는 데 어머니가 쌀을 주었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에서 능구렁이를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돈을 주려고 하고 땅꾼은 안받으려 하고 한참 옥신각신 실랑이가 벌어지고...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고(아마 시가보다 훨씬 싼값이었을 것이다)  능구렁이를 넘겨 받았다.

능구렁이를 고아서 허리가 아프시던 아버지가 약으로 잡수셨다.

 

아이들이 얼마 후면 은어가 올라오는 데 은어가 올라오면 잡으러 가자고 했다.

은어를 잡으러 갈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 데 갑자기 우리집이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때가 모내기를 할 때인 6월 상순이었다.

이삿짐은 남학생들 몇명이 양양까지 지게에 지고 갔다.

아마 이부자리와 취사도구 옷가지 등이 짐의 전부였던 것 같다.

양양에서 양구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에 짐을 실었는 데 짐을 전부 싣고 간 것 같다.

양양에서 바다를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 진부령을 넘어 인제를 경유하여 광치고개를 넘어 양구로 갔다.

얼마동안 양구 구암리 이모댁에 있다가 광덕국민학교 관사로 이사를 했다.

양구 광덕국민학교는 초가지붕이 아니었다.

함석 지붕의 건물이었고 바닥에는 마루도 깔려 있어 초가지붕이었던 먼저 학교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그런데 책걸상이 없어 마루에 엎드려 공부를 하거나 어떤 애들은 작은 책상을 가지고 와서 공부를 했다.

그해 가을 운동회를 하지 않았는 데 이런저런 돈을 가지고 책걸상을 구입하여 왔다.

 

양구로 이사를 올 때가 '58년 6월초였는 데 양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65년에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춘천으로 올 때까지 7년간을 양구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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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현성국민학교 장리 분교장 전교생의 모습. 앞줄 중앙 오른쪽의 안경을 쓴 분이 필자의 선친이시고

 왼편에 계신 분이 필자의 담임선생님이신 이재풍 선생님. 선친과 선생님이 안고 있는 아이들은 사진 찍는 데 찬조출연한 필자의 여동생들.

1997년인가 현성국민학교 교장선생님에게 전화를 해 기억을 더듬어 선생님에 대해 말했는 데(선생님의 성만 기억이 났음) 교장선생님이 선생님의 친구분이라 연락이 되어 그뒤 선생님을 뵐 수가 있었다. 2000년엔가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시고 지금은 양양 감리교회 원로 장로이신데 선생님께서 오래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오른편 뒤의 초가가 학교 건물. 장리분교는 그후 남천초등학교로 승격하였다가 몇년전 폐교되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