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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추억 속의 가설극장

내가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1,2학년때로 기억된다.

두편의 영화가 기억나는 데 한번은 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한 것이다.

아마 계몽영화였던 것 같은 데 기생충에 대한 위생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른 한편은 아버지를 따라 속초의 어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었는 데 내 수준에 맞지 않아서인지

무슨 장면을 보기는 했는 데 기억이 없고 영화를 보다가 잠을 잤던 것만 생각난다.

 

초등학교 3학년때 양구 광덕국민학교로 전학을 왔다.

가오작리에 있는 초가로 된 집에서 살았는 데(당시는 가오작리의 집 대부분이 초가였다) 교장선생님과 사범학교를 나온지 얼마 안되는 젊은 여선생님이 어머니와 같이 이웃에서 살았다.

이웃에는 동급생으로 성하섭이와 전장하가 살았고 길건너엔가 여동생과 동급생인 홍원자와 나중에 양구 부군수를 지낸 김대영이 살았고 개울 건너 양지말에는 서울에서 목회를 하는 동급생인 방한길이 살았다.

바로 위인 비석거리 마을에는 같은 학년인 전완하와 윤호병 박진수 엄정호 등이 살았다.

다음해 6월 적리로 이사를 갈 때까지 가오작리에서는 1년을 살았다.

교장선생님 사모님은 어머니보다 나이가 아래였는 데 우리집에 자주 놀러 오셨다.

 

어느날에가 마을에는 영화포스터가 붙고 트럭이 지나가며 무어라 외쳐댔다.

어른들은 용하리에 가설극장이 들어왔다고 했다.

마을의 많은 분들이 영화구경을 한다고 밤중에 용하리까지 걸어 가셨다.

교장선생님 사모님이 우리집에 오셔서 '검사와 여선생'이라는 영화를 본 이야기를 하셨다.

얼마나 감동적으로 이야기를 하셨는지 어린 나는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적리로 이사를 간 후에도 가설극장은 들어 왔다.

한해에 여러번 가설극장이 들어왔던 것 같다.

영화 포스터가 붙고, 트럭이 다니며 선전을 하고, 마을 어른들은 극장에를 다녀 오셨다.

 

1960년 3.15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한창일 무렵인 4월 우리집은 지석리 고인돌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어

원당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고인돌 마을은 부대의 후문에 있는 적리와는 다른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이곳에도 가설극장이 들어와서 선전을 하였다.

덕곡리 공터에서 상영을 했는 데 초등학교 5,6학년이 되어 호기심이 강할 때라 가설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영화를 보는 것을 엄금하셨기 때문에 감히 영화를 보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또 영화 관람료를 내어야 했는 데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영화를 보는 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학교에서 한녀석이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휘장을 걷어 누구가 볼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중간에 휘장을 걷을 무렵에 가설극장 부근에 가서 서성거렸다.

그러나 거의 끝날 무렵에 휘장을 걷어 끝부분만 조금 볼 수 있었다.

가설극장의 모습은 경우에 따라 달랐겠지만 덕곡리에 설치된 극장은 지붕이 없고 광목천 같은 것으로 휘장을 둘러쳤고 입장료를 받는 입구를 통해 꺾어져서 입장을 할 수가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라 발전기를 돌려 일으킨 전기로 영사기를 돌렸기 때문에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학교에서 한 녀석이 아이디어를 냈다.

돈을 조금씩 모아 한 녀석을 입장시키고, 먼저 들어간 녀석이 안에서 상황을 보아 밖으로 신호를 하여 휘장을 들치면 몰래 들어가기로 모의를 했다.

입장료가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몇이서 돈을 모아 한녀석을 입장시켰다.

바깥에서 서성거렸지만 안에서 신호가 없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조금 있다가 신호가 왔다.

둘러친 휘장을 들치고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들키지 않아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봉의 김선달"이라는 영화였다.

필름이 낡아서였는지 화면에서는 비가 내리고, 중간중간 필름이 끊어져서 상영이 중단되었다.

영화가 중단되면 관객은 휘파람을 불고 야유를 하였다.

필름을 이었는지 다시 영사기가 돌아가고 영화는 상영되었지만 10번도 넘게 필름이 끊어지는 것이 반복되고 중간 중간 필름을 끊어먹었는지 줄거리가 잘 연결되지 않았다.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가설극장 영화는 실망 속에 끝났다.

 

중학교에 진학을 한 후에도 해마다 가설극장은 들어 왔다.

때로는 밀가루, 다라 등 경품을 내걸기도 했다.

중학교때부터는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관람을 했기 때문에 가설극장에 대한 흥미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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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춘천으로 이사를 간 후 가설극장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1974년 모교에 교사로 부임을 하였는 데 이때에도 가설극장이 들어 왔다.

아마 순회하는 가설극장은 이때가 거의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용하리에 가설극장이 들어와서 영화를 한다고 하였다.

양구읍내에 있었기 때문에 밤중에 하는 영화를 보러 용하리까지 갈 수가 없었다.

아마 학생들 중에는 영화를 관람한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을 담벼락에 붙은 영화 포스터와 트럭에서 하는 선전 방송의 장면이 떠오른다.

가설극장은 이제 추억 속의 한 장면이 되어 존재할 뿐이다.

 

 

 

가설극장 선전 모습

 

 

가설극장 풍경

 

 

가설극장 포스터

 

자료 출처 http://cafe.daum.net/happyhomefeel/M9aa/33?q=%B0%A1%BC%B3%B1%D8%C0%E5&r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