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았는 데 시험은 1961년 12월에 치르었다.
체력검사의 총점대비 비중이 굉장히 높았는 데 추위에 떨며 체력검사를 하였다.
5.16 군사혁명후 첫 초등학교 졸업생과 중학교 입학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과목마다 선생님이 다른 것에서 초등학교때와 차이를 느낄 수가 있었다.
상급생을 보면 거수경례를 해야 하고, 형이나 누나라고 부르며 경어를 쓰는 것도 초등학교때와 큰 차이였다.
매주 월요일 아침에는 애국조회라는 것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열병과 분열을 한 것이었다. 조례대 위에는 교장선생님이 서계셨고 그 옆에는 선생님들이 도열해 있었는 데
학생들은 그 앞을 행진해 갔다.
이런 열병과 분열은 2학년때부터는 하지를 않았다.
병설되어 있는 고등학교가 농업고등학교였다. 실습지가 굉장히 많았는 데 고등학교의 인원이 많지를 않아 중학생들도 노동력이 많이 필요할 때는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주로 농업시간에 실습 명목으로 일을 하였지만 모내기나 퇴비베기 등을 할 때는 날을 잡아 수업을 전폐하고 노력동원이 되었다.
그밖에 아카시아 씨앗을 내어야 했고, 식목때는 정해진 규격과 수량의 미류나무 가지를 납부해야 했다.
모내기에는 이틀간 동원되었는 데 고등학교 형들이 모를 심고 1학년 등 하급생은 모를 운반하거나 논에 던져 넣는 모쫑 노릇을 했다.
가장 힘든 것은 퇴비베기였다.
1학년때인 '62년에는 여러번 퇴비베기가 있었다. 아마 당시 군사정부가 퇴비생산을 독려했기 때문이리라.
처음 퇴비베기를 할 때는 1인당 목표량이 45관(약 170kg)이었다. 이것을 이틀간에 베어다 내야 하는 데 첫날은 풀을 베어서 멜빵으로 져나르다가 도저히 안되어 다음 날에는 친구와 같이 리야카를 빌려서 파로호에 가서 풀을 베어다 내었다. 목표량의 절반을 조금 넘길 정도밖에 채우지 못했다.
즐거운 것은 시식회였다. 추수가 끝난 11월 어느날 전교생에게 시루떡과 국과 돼지고기가 약간씩 배부되었다.
내짝은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나에게 몰아주었는 데 고기가 귀한 시절이라 얼마나 좋왔던지....
지금도 그 친구를 만나면 그때의 일이 생각난다. 정작 그 친구는 나에게 돼지고기를 주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한달에 한두번 정도 단체로 극장구경을 가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였다.
당시에는 군인극장이 시설이 더좋와 주로 군인극장으로 영화관람을 갔다. 문화극장은 좁고 냄새가 나고 시설이 낡았었다.
그때 본 영화 중에는 벤허 등 명작이 많았다.
'62년 120명이 입학했으나 95명 정도가 졸업하였다. 당시에는 딸은 교육을 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아 여학생들은 남학생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94년 모교에 근무할 때 동기회 명부를 만드느라 서고에서 제적대장을 열람하였다.
같이 졸업을 하지 못한 사유는 전학을 간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교납금 미납으로 제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생활기록부 뒤에 붙은 교납금 미납으로 제적이라는 사유서를 보며 눈물이 핑돌았었다.
이 친구들은 가진 고생을 하며 자수성가를 하였다.
입학당시 한달 교납금(월납금)이 1400환(화폐개혁으로 140원이 됨)이었고, 2.3학년때는 175원이었는 데 당시 2홉짜리 소주 한병이 20원, 오징어 한마리가 5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부대 연탄공장에 다니는 이웃 아저씨의 하루 일당이 100원이라고 들었었다.
중학교 당시 홍안소년들은 지금은 60대 중반을 넘긴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며칠후인 8월 9일에는 광치계곡에서 동기들이 모인다.
해마다 30명 정도가 모여 옛정을 나눈다. 몇년전만 해도 밤새워 마시며 떠들던 친구들이 어느해부터인가 12시가 되기도 전에 모두
잠자리에 든다.
동기들 모두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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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학교 앨범에서 발췌한 사진들이다.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한 것이라 화질이 떨어지는 것을 양해하기 바란다.
졸업앨범 속표지
양구중학교 교기
1964년 당시 학교 전경. 정면에 보이는 곳이 중학교,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 고등학교와 교무실로 기억된다.
박한복 교장선생님의 직무광경. 과학기술 교육 진흥이라는 구호가 있지만 실험기구 하나 갖추어지지 못해 과학실험을 한 기억이 없다
졸업 앨범사진 맨 오른쪽 아래가 필자, 그 위에가 양구여고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주영성군.
수학수업시간과 이영래 선생님. 선생님은 실력이 있는 분으로 나중에 원주고 교사, 춘천고 교감, 연구원 부장 등을 역임하심.
모내기 광경. 큰 도로에서 보면 학교 좌측 송청리 방향으로 운동장에 접해 있었음.
양구 군인극장
시식회 광경. 왼편이 A반 담임이신 윤병덕 선생님, 그 옆이 농업담당 김원백선생님, 오른편이 B반 담인 엄봉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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