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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어린 시절의 단상 - 고물캐는 사람들

우리 동기들 대부분은 한국전쟁(육이오 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에 태어나서(극히 소수가 전쟁 발발 후 출생)

전쟁 중에 유아기를 보내고, 전후의 빈곤한 시기에 학령전 아동시기와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경제 개발의 삽질과 햄머소리가 한창일 때 중고교 시절을 보냈고,

전후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가 발전하여 절대 빈곤의 시기를 벗어났을 때 청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상황이 우리 또래들에게는 四柱가 되어 우리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빈곤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 내가 직접 겪었거나, 아니면 어린 눈에 비춘 우리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통한 간접체험의 기억을 재현하여 우리 세대의 퇴장과 더불어 묻혀져 갈 삶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막상 표현하려고 보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삶의 극히 작은 부분의 파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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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막골이라는 영화를 촬영지인 평창 미탄에서 출생한 나는 태어난지 한달이 조금 넘어 육이오 전쟁이 났다.

다행히 어머니가 산후 회복을 끝낸 상태라 피난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평창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몇년을 살다가 속초에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양양군 현북면에 있는 분교장을 거쳐 양구로 간 것이 초등학교 3학년때였다.

 

양구는 먼저 살던 속초나 양양 현북면의 장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학교를 갈 때면 군부대 앞을 지나서 가야 했고, 군인들이 훈련을 받거나 이동을 하는 모습이 항상 목격되었다.

사격 연습이라도 할 때면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렸고 포사격 훈련을 할 때면 포성이 들려 왔다.

훈련 때 군인들이 커다란 무전기를 들고 무어라 큰 소리로 외치며 마지막에 "감을 잡았다. 이상"이라고 하는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납을 캐러 간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납광산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친구들을 따라 갔다.

납을 캐는 곳은 사격장이었다.

이곳에는 애들만 온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사격장에서 흙을 파헤치며 흩어진 탄환을 수거했다.

초짜인 나는 몇개 줍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납을 캔 이야기를 했다가 부모님에게 되게 꾸중을 들었다.

절대 사격장 근처에 얼씬대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다. 그후 나는 사격장 부근에 가지를 못했다.

 

마을에는 고철을 수집하는 고물상이 있었다.

친구들은 줏어온 탄환을 그릇에 넣고 불로 가열하여 녹였다.

녹는점이 낮은 납은 융해되어 납을 싸고 있던 금속과 분리되게 된다.

이때 녹은 납을 쏟아내어 굳혀서 식힌 후 고물상에 팔게 되면 꽤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고물상에는 탄환에서 녹여낸 납덩어리뿐만 아니라 많은 금속들이 모여 왔다.

전화선을 모아 불에 태우면 전선의 피복이 벗겨지고 구리선만 남게 된다.

이 구리선 역시 값이 좋왔다.

아이들은 군인들의 야전 훈련이 끝나면 산에 가서 전화선을 모아다가 태워서 구리선을 팔았다.

 

어른들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고철을 수집했다.

산에서 폭탄 탄피 등을 수거해다가 팔았다.

겁이 나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불발탄을 분해하여 팔기도 했다.

폭탄의 분해는 아주 위험한 작업이었지만 폭탄을 분해하면 여러가지 고가의 금속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작업을 했을 것이다.

산에 놀러 가면 불발된 폭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논에는 항아리만 한 폭탄이 거꾸로 쳐박혀 있기도 했는데 우리는 겁이 나서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또, 땅을 파고 고철을 캐기도 했다.

아마 미군들이 못쓰는 장비를 매립하였거나, 아니면 후퇴할 때 묻어둔 것이었으리라.

고철 구덩이를 잘만나 대박을 터뜨렸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였다.

 

하루는 어른들이 파헤쳐 놓은 고물 구덩이를 지나게 되었는 데 미군들이 버린 쓰레기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돈수라는 녀석이 쓰레기 더미를 뒤지더니 커피라고 하면서 작은 봉지 하나를 줏어 들었다.

그는 봉지를 벗겨내고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혼자서 무슨 가루를 먹는 모습을 입맛을 다시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쓰레기 더미는 7-8년간 땅속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우리 반의 병훈이는 오른손 둘째 손가락이 하나만 남아 있었다.

어려서 외삼촌과 같이 폭탄을 가지고 놀다가 폭발하여 외삼촌은 죽었고 병훈이는 오른손의 네 손가락을 잃었다고 했다.

1년에 한번씩 군부대에서 학교를 방문하여 폭발물 안전교육을 시켰다.

폭발물 사고로 희생된 희생자의 끔찍한 사진을 전시했고, 교관이 직접 폭탄을 폭파시키는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부모님의 엄명과 겁많은 내 성격 때문에 나는 돈의 유혹을 뿌리치고(?) 고철을 수집하는 데는 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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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이 되면서 2년간 다니던 광덕초등학교에서 이웃한 원당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곳에도 고물상은 있었다.

어디서 모여드는지 고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엿장사들이 다니며 고철을 부지런하게 수집해 갔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토박이들이 많았고 주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중학교 1학년때였다.

식목일 때로 기억된다.

모교에 놀러 갔었다. 나무를 심고 있었는 데 땅을 파니 미군들이 묻어 놓은 것들이 나왔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곳에서는 비게 허옇게 엉겨 있는 큰 덩어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한 구덩이에서는 스푼, 포크, 나이프, 국자 등이 발견되었다.

스테인레스 제품이라서 그런지 10년이나 땅속에 있었는 데도 녹이 하나도 슬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우리집에서 이것들을 가져다가 오랫동안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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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이 되며 고인돌 마을에서 남면 창리 마산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갔다.

이 마을은 국토의 정중앙이라는 도촌리 바로 옆의 마을이고, 최무성, 권석봉과 2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한 박승균이가 창리와 도촌리에 살았다.

마산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농토가 없어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팔거나 고철을 수집해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마을에는 고물상이 있었다.

 

중3때 고철 탐지기라는 것이 나왔다.

둥근 테모양으로 된 것인데 금속이 있으면 소리가 났다.

금속 탐지기가 보급되고 나서 여러 곳에서 고철 구덩이들이 발견되었다.

미군들이 장비를 폐기한 곳이었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금속탐지기로 고철의 매립장소를 발견하고는 땅을 파고 들어갔다.

언땅이라 파기가 나빴다.

곡괭이로 언땅을 쪼아내며 땅이 얼지 않은 곳까지 파 내려 간 후에는 언땅 밑으로 파들어 갔다.

마치 광산에서 갱도를 뚫듯이 땅을 파고 들어가서는 고철을 캐내었다.

어느 곳에서는 탱크를 캤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보안대 등 군의 권력 기관을 끼고 민통선 이북에 가서 고철을 수집해 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업자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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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수집과정에서 생긴 폭발물 사고로 인한 피해도 많았다.

어린이들은 호기심으로 폭탄을 만졌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우리 마을의 선배가 조명탄을 가지고 놀다가 폭발하여 화상을 입고 사망을 한 일이 있었다.

이웃 학교인 용하 초등학교에서는 두 어린이가 수류탄을 줏어다가 교실에서 가지고 놀다가 폭발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쉬는 시간이라 애들이 모두 운동장에 나가 놀았기 때문에 두 어린이만 희생되었다.

 

중3때 중학교 운동장에서 초등학생들의 축구 경기가 있었다.

이때 내가 3-4학년때 다녔던 성환이라는 광덕 초등학교의 후배가 골키퍼를 아주 잘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어린이들 몇이서 폭탄을 줏어서 군인들이 파놓은 교통호에서 분해를 하다가 폭발하여 모두 폭사를 한 사고가 났다.

 

고등학교를 입학하며 나는 춘천으로 왔고 얼마후 우리집도 춘천으로 이사를 왔다.

우리집이 이사를 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다.

우리집 옆방에 세를 들어 살던 집이 있었는 데 학교에를 다니지 않는 내 또래의 소년이 있었다.

그가 폭탄을 줏어다가 분해를 하다가 폭발하여 현장에서 즉사를 하고 어머니는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생활고가 빚은 비극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양구 초등학교에를 다녔던 샌디킴이라는 혼혈아가 있었다.

나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두 학년 밑이었다.

그는 나중에 가수로 데뷰를 해서 히트곡도 한곡 내었지만 그후 빛을 보지 못하였다.

프로 복서를 하기도 했지만 성공을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 갔다고 한다.

그후 귀국하여 TV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했는 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성공해서 경비용역회사를 운영한다고 했는 데 강원도민회에도 적극 참여한다는 것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 샌디킴의 양아버지가 고물 장사를 했다.

양구에는 고철 수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엿장수 한분은 폭탄에 팔을 잃어 한 팔이 없었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 고철을 수집해서 팔고 있었다.

 

세계 최빈국이라는 방글라데시는 폐선박을 수입해다가 해체하는 것이 중요한 산업의 하나라고 한다.

안전장치도 없이 선박의 철판을 절단하고 있었다. 절단된 금속판을 철강재료로 사용한다고 했다.

선박에 사용했던 주방용 기구와 욕조, 침대나 의자 등 각종 집기류들을 끄집어 내다가 팔고 있었다.

이 모습은 마치 6.25 당시나 그 후 미군들이 버리고 간 폐장비나

전쟁에서 살상무기로 쓰였던 탄피와 파편, 불발탄 등을 수집해서 살았던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했다.

 

목숨을 걸고 고철을 수집했던 민초들의 고달팠던 삶은 이제 육이오를 경험했던 세대의 퇴장과 더불어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춘천고등학교 40회 동창회 카페에 올렸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