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정보 전달 수단은 가까운 곳에는 소리를 질러서 전하는 것이었고, 거리가 떨어진 곳에는 편지를 전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봉화와 파발말은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정보의 전달 수단이었을 것이다.
전신기가 발명으로 전보라는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전화기의 발명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음성 전보를 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도입된 것은 고종황제때라고 한다.
백범 김구선생님이 사형을 면하게 된 것도 고종황제의 전화덕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화가 일반화되기에는 거의 한세기 가까이 걸렸다.
급한 연락은 전보라는 것으로 하였다.
글자 수에 따라서 요금이 달랐기 때문에 극히 축약된 표현으로 의사를 전달하여야 하였다.
잘못된 전보로 인하여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때인 '57년도 이른 봄이었다.
밑의 남동생이 태어나던 해인데 동생이 태어나면 간호를 하기 위하여 큰어머니께서 오셔 계셨다.
그런데 한통의 전보가 온통 집안에 소동을 불러 왔다.
큰댁에서 보낸 전보였는 데 '광현(사촌형님의 이름) 조모 사망 급래' 이런 전보였다.
동생이 태어날 때가 되어 만삭이 되신 어머니가 움직이실 수도 없고, 따라서, 큰어머니도 어머니 곁을 떠나실 수 없었다.
어머니와 큰어머니는 소복을 하시고 머리를 풀고 장독이 있는 곳에서 곡을 하셨다.
아버지 혼자서 춘천에를 가셨다.
아버지가 돌아오시자 갑자기 큰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셨다.
춘천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께서는 내가 묻는 할머니 장례에 대하여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어린 나는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문을 묻어둔 채로 시간이 지나가게 되었다.
그해 여름방학때 춘천 큰댁에 다니러 왔다.
할머니가 계신 것이 아닌가?
나는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였는 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여쭈었고 할머니는 "먼저 할미는 죽었고 나는 새 할미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학교에 갔을 때 함구령을 내리셨고.
후일에 들은 진상은 이러했다. 사촌형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 데 전보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외조모 사망'이 '조모' 사망으로 전달된 것이다. 이때문에 큰어머니는 친정어머니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셨고, 어머니는 사돈이 돌아가셨는 데 곡까지 하신 셈이 되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학교에서 조위금을 갹출하여 드렸는 데 체면상 진상을 이야기하기도 그렇고 하여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진상이 밝혀지게 되었으니 사촌형님의 사범학교 동기생인 원선생님이 방학때 큰댁에 들렸다가 할머니를 뵌 것이다.
할머니는 그후 5년을 더 사시고 내가 중학교 1학년때인 겨울방학때 돌아가셨다.
만약 전화만 있었다면 이런 소동이 없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전화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양구로 전학을 온 후에야 군인들이 훈련때 사용하는 전화와 무전기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느라 춘천으로 온 후에 처음으로 전화라는 것을 사용하여 보았다.
우리반 급우들 가운데에도 전화가 있는 집은 극히 드물었다.
비상연락망은 학교에서 전화가 있는 집으로 연락이 오면 이를 받은 사람이 친구 누구에게 전언을 하고, 이 친구는 다음에 누구에게 전하고 하는 식으로 전달하는 연락망이었는 데 내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한번도 비상 소집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대학에 다닐 때 시외 전화를 할 일이 있으면 우체국이나 전화국에 갔다. 줄을 서서 기다렸는 데 한 시간 이상 기다리는 때도 있었다.
요금을 두배를 내면 지급이라고 하여 기다리는 시간이 줄기도 하였다.
3분 한통화였는 데 전화의 감이 좋지를 않아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들을 수가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시 확인하다 보면
아무리 용건만 이야기하려 하여도 3분이 넘게 되고 엄청난 요금을 물어야 했다.
'74년 모교인 양구중학교에 부임하여 처음으로 담임을 맡았을 때도 전화가 있는 아이들은 10%도 되지 않았다.
'75년 겨울 어느날 폭설이 내려 제설작업을 하느라 비상소집을 하였는 데 우리반은 대부분이 연락을 받고 등교를 하였으나 다른 반은 10%도 오지를 않았다. 까닭은 모교에서 근무하는지라 지역 실정을 잘알기 때문에 연락망을 잘 짜놓은 덕분이었다.
'80년대 중반이 되면서 전화가 급속히 보급되었다.
'84년에 우리 집 안방에도 전화가 가설되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85년 춘천여중으로 전임하여 보니 절반 정도의 가정이 전화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후 5년도 안되는 기간에 아주 가난한 몇 가정을 빼놓고는 모두 전화를 소유하게 되어 비상연락망도 릴레이 전달식이 아닌 전화 연락망으로 개편되게 되었다.
'90년대 후반의 특징은 휴대전화의 보급이다.
박노해시인은 복역을 마치고 나와서 가장 큰 변화를 느낀 것이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수업시간에도 벨소리가 울리는 일이 있고, 교회 예배시간에도 전화벨이 울리는 일도 있다.
산만한 녀석들은 문자 메시지를 날리다가 붙들려 혼나기도 하였다.
1999년 다시 춘천중학교로 전임하였을 때는 반에서 휴대전화를 가진 녀석들이 30%는 되었다.
우리집도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부터 휴대전화를 갖기 시작하였다.
재작년에는 내가 휴대전화를 소유하게 되었고(그러나 전화를 걸고, 받고 문자메시지를 읽고 하는 극히 제한된 기능만을 사용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 소유에 대한 저항을 하던 아내까지 휴대전화를 갖게 되어 여섯 식구가 모두 전화를 한대씩 소유하게 되었다. 요금이 전화요금이 쌀값보다 더 들어가는 기현상이 초래되었다.
몇년 사이에 우리 생활에 끼어들어 온 승용차와 핸드폰, 인터넷 통신료 등이 가계의 지출을 늘리는 것을 강요하게 되었다.
어쩌다가 휴대전화를 두고 외출하게 되면 불안한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마을에 시계를 가진 집이 몇 집이 되지를 않아 어른들의 심부름으로 이웃집에 시간을 물으러 가던 일이 엊그제 같다.
학교에서나 전화 구경을 할 수 있고, 전보를 통하여 급한 연락을 하던 시대가 불과 한세대도 안된 그런 때였다.
지금은 움직이며 실시간으로 정보교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행복지수도 높아지게 되었을까?
통신을 통하여 이웃과의 교감과 정이 더 커지게 되었을까?
문명의 이기는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 주지만 많은 것을 잃게 하였다.
이제 전기가 없는, 자동차가 없는, 아파트가 사라진,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는 그런 세상을 살기는 어렵게 되었다.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정신이 없이 변하는 세상 중에 정신을 잃지 않고 사는 것과 새로운 시대에 맞는 바람직한 생활의 모습을 창출하여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03년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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