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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어린 시절의 단상 - 군인들의 훈련 모습

군인의 모습을 거의 못보고 살다가 양구에 이사를 왔을 때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은 군인들이었다.

가오작리에서 광덕국민학교로 등교를 할 때는 대대 앞을 지나야 했다.

학교를 중심으로 동면쪽으로는 연대본부가 양구 가는 방향으로는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학교에 등교하노라면 부대 맞은 편 길건너에 있는 사격장에서는 사격훈련을 하였다.

깃발을 들고 군인들을 통제를 하고 있었고, 사선에 엎드린 군인들은 개울건너 과녘을 향해 총을 쏘았다.

때로는 군인들이 빠따를 맞거나 엎드려 뻗쳐를 하는 등 구타를 당하거나 기합을 받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도로에는 주행연습을 하는 차량들이 대열을 이루어 지나갈 때도 있었다.

20여대의 차량이  선도차의 뒤를 따라 대열을 지어 이동했는 데 선도차는 대부분 찝차로 앞에는 ''선도'또는 나를 따르라'라고 썼고

맨뒤의 차에는 폐쇄'라는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비포장 도로라 가물 때면 먼지가 피어 올라 차량이 보이지를 않았다.

대열의 마지막에는 견인차가 따라갔는 데 우리는 '달아 올리는 차'라고 불렀다.

학교에 등하교를 하다가 훈련하는 차량 대열을 만나면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 쓰는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군인들을 호송하기도 했다.

군인들은 무장을 한 채 트럭에 앉아서 어디론가 이동을 했다.

 

개울가에서 놀다가도 종종 군인들의 훈련 모습을 목격했다.

커다란 무전기를 멘 군인은 '여기는 갈매기 하나, 갈매기 둘 나오라'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호출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감을 잡았다. 이상'이라고 외쳤는 데 이 말의 뜻을 알은 것은 뒷날의 일이다.

 

어떤 날은 군인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행군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맨 앞에 길 양옆으로 첨병 두 명이 지나가고, 좀 거리를 두고 몇명의 군인이 행군을 하고, 좀 거리를 둔 다음 그뒤를 따라

많은 병력이 이동해 갔다.

철모와 옷에 풀이나 나뭇가지를 꽂아 들판에 매복해 있을 때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군인들이 구보를 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되었다.

군가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치며 구보를 했는 데 '북진, 북진'하면서 구보를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탱크가 이동을 할 때는 굉음을 내며 전진했고 지축이 울렸다.

탱크가 오면 겁이 나서 길가 배수로 건너까지 이동을 해서 탱크가 가는 모습을 보았다.

탱크 앞에는 주포가 앞으로 나와 있고 위의 포탑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고, 군인 한명이 몸을 노출시킨 채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탱크는 겁이 났지만 커다란 굉음을 내며 이동하는 모습은 구경거리였다.

 

포를 끌고 이동하는 차량들도 자주 목격되었다.

트럭 뒤에는 견인포가끌려서 이동되었다.

추수가 끝난 계절에는 들판에 대포를 설치한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위장 그물을 치고 그 아래에 포를 숨겨 놓았다.

'58년 가을로 기억된다.

길에서 차량이 이동하는 굉음이 들리기에 나가 보았더니 엄청나게 큰 포탄을 탑재한 트럭들이 이동을 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유도탄이라고 했다.

몇년 전 백선엽장군이 쓴 '군과 나'라는 책을 읽어 보니 미국에서 미사일을 들여 와서 전국을 돌며 무력시위를 한 기사가 있었다.

탱크가 한대도 없어 6.25 초기 북한군에게 밀리기만 했던 쓰라림을 기억하는 군인이나 국민들은 미사일을 탑재한 트럭이 시위를 하는 것을 보고 강화된 국방력에 안도를 하였을 것이다.

 

가장 큰 구경거리는 기동훈련이었다.

추수가 끝난 후부터 밭을 갈기 전인 이른봄 사이에 기동훈련이 이루어졌다.

국군이나 북한군 복장을 한 군인들이 이동하기도 하였다.

훈련이 있을 때는 산봉우리를 향해 군인들이 포복을 하며 산위를 향해 진격을 하는 모습이 보였고, 총소리가 콩볶듯이 나기도 했고,

가끔은 포소리가 나기도 했다.

 

광치 검문소에서 차량을 통제하고 훈련을 했는 데 1주일 가까이 훈련을 한 것 같았다.

많은 군인들이 이동했고, 차량이 이동했고, 탱크가 이동하기도 했다.

헬기가 뜨는 경우도 있었다.

탱크가 이동하거나 군인들이 이동하거나 훈련하는 모습은 어린 우리들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

적리의 연대 본부 건너편 산봉우리에는 헬기장이 생기고 산꼭대기에 헬기가 뜨고 내리기도 했다.

 

훈련이 끝나고 나면 아이들은 옷에 풀이나 나뭇가지를 꽂고 나무 막대를 총으로 삼고 병정놀이를 했다.

어떤 때는 군가를 부르며 행군하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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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는 초가지붕을 한 건물에 아래는 검은색이 나고 위에는 흰색을 띄는 벽을 한 건물이었다.

아마 아래는 콩크리트 벽을, 위에는 백회를 바른 벽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는 군인들이 세수를 하러 개울로 이동을 했다.

추운 겨울에도 개울에서 세수를 했다.

여름에는 개울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주위에 사람이 있건 없건 옷을 모두 벗고 목욕을 했다.

 

창리 마산에서 걸어서 중학교를 다닐 때다.

한 여름에 하교를 하다 보면 황강리 앞 개울에서 군인들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완전 나체로 목욕을 하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보고 손을 흔드는 경우도 있었다.

여학생들은 책가방을 올리고 머리를 반대방향으로 돌리고 그 앞을 지나갔다.

 

군인들이 빨래를 하러 개울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개울에는 온통 군인들로 덮혔고, 빨래를 마치고 돌아간 후에 우리는 개울가를 서성이며 비눗조각을 줏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군인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였다.

더운물도 안나오는 막사에서 얼음을 깨며 개울물에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하였다.

또, 빨래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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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를 할 때와 벼베기를 하는 농번기에는 군인들이 대민지원을 나왔다.

군인들은 모를 아주 잘 심었다.

당시에는 대부분 농촌 청년들이 입대를 했기 때문에 모내기를 잘했을 것이다.

가을에는 벼를 베는 일을 지원했다.

농가에서는 대신 볏짚을 부대로 보냈고, 군인들은 이것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었다.

 

오랫동안 젊은 남자들끼리 통제된 공간에서 살다보니 이성이 그리울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가오작리에 관사가 있었고 학교에 등교를 하려면 대대 앞을 지나가야 했다.

광덕국민학교에는 사범학교를 갖나온 여선생님들도 계셨는 데 가오작리 관사에서 출퇴근을 했다.

출퇴근을 할 때 군인들이 히야까시를 하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님들이 애로 사항을 이야기했고, 교장선생님이 부대장에게 항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뒤에는 선생님들이 출퇴근할 때 히야까시를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차를 타고 가는 군인들이 아가씨가 지나가면 히야까시를 하며 지나갔다.

한번은 이종사촌 누님과 같이 길을 가고 있는 데 군 트럭이 지나가며 트럭에 탄 군인들이 누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히야까시를 했다. 누님은 묵묵히 머리를 숙인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군인 한명이 싣고 가던 부식 중에 무엇인가를 던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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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춘천으로 이사를 온 후에는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더 볼 수 없었다.

'97년에 방산중학교에서 근무를 했지만 어렸을 때처럼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군관민이라는 호칭순서가 민관군으로 바뀌며 군인들은 차량 이동을 할 때도 가능한 한 민간인들의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때로는 행군 모습이나 훈련하는 병사들을 태우고 이동하는 차량이나 탱크가 보이기도 했지만 가능한 한 민간인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배려를 하는 것 같았다.

 

양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군인들의 훈련 모습이나 생활 모습은 잊지 못할 기억일 것이다.

 

위의 글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중학교때까지의 기억을 종합해서 쓴 것으로 어느 한해나 한 지역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2014. 1. 11

 

히야까시 - 놀린다는 뜻의 일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