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사판에서 다이나마이트 폭파
1960년에서 1961년 2년동안 양구 동면 월운리의 저수지 공사와 저수지에서 후곡리까지 농수로를 내는 공사가 있었다.
이 공사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시행되는 공사였던 것 같다.
수로 공사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 들어 일을 하였다. 한 길은 되는 깊이로 도랑을 파고, 역 사다리꼴로 수로를 만들었는 데 모두 인력으로 작업을 하였다.
딱딱한 땅은 곡괭이로 파내고, 가래질을 하여 파낸 흙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딱딱한 암반이 나오는 경우는 다이나마이트를 폭파하여 암반을 파괴하고 공사를 하였다. 다이나마이트(당시는 남포라고 하였다)를 폭파시킬 때면 사람들을 모두 멀리 대피시키고 폭파를 시켰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서 폭파 장면을 지켜 보았는 데, 엄청난 굉음이 나면서 돌맹이 들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가고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1980년엔가 내가 근무하던 횡성 갑천 지역에 도로포장공사가 있었다.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을 하는 꽤 큰 공사였는 데, 장비 몇 대와 덤프 트럭 몇 대가 일을 하였고, 삽을 든 인부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폭파를 한다고 하여 지켜 보았는 데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바윗 덩어리가 솟구치는 생각을 하고 바라 보았지만 ‘퍽’하는 소리만 났고, 암석의 파편은 튀지도 않으면서 폭파작업이 완료되었다.
20년 사이에 많은 발전을 하였던 것이다.
2. 자유의 벗 잡지
초등학교 시절(‘70년대 초까지 발행되었다고 함) 자유의 벗이라는 잡지가 발행되었다. 미 공보처에서 발행하는 잡지였는 데 지금의 B4 크기의 규격으로 나온 책이었다. 당시 교과서는 누런 갱지로 만들어졌었고, 흑백으로 된 삽화가 실려 있었지만 이 자유의 벗은 빳빳한 고급 종이로 제작이 되었고 천연색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는 호화판 책이었다. 쪽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 얇은 잡지였는 데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것은 베트남 전에 대한 화보와 파나마 모자를 만드는 공장에 대한 소개와 이광 야학교라는 야학교에 대한 소개였는 데 아마 미국의 정책 홍보와 전후 복구에 대한 내용, 미국 문화에 대한 소개가 내용의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 자유의 벗은 교과서 겉장을 싸는 데 이용이 되었고, 봉투를 만드는 데 이용이 되기도 하였다.
양초를 포장하는 종이는 예외없이 자유의 벗에 덧씌우기 인쇄를 한 것이었다.
이 자유의 벗은 처음에는 학생들마다 한권씩 배급을 주던 것이 나중에는 학급이나 학교 단위로 보급이 되다가 다른 책들이 많이 나오면서 폐간되었다.
3. 학원사 문고
우리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가장 인기가 있는 잡지는 학원이라는 잡지였다. 학원사에서 발행되던 잡지였는 데, 시골에 있는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어쩌다가 한권을 보면 재미가 있었는 데(특히 연재 소설과 만화는 재미 있었다) 책을 구할 수가 없어서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대한 궁금증만 남기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학원이라는 잡지를 사볼 형편도 되지를 못하였고, 시골이라 이 책을 읽는 친구도 없으니 빌려서 읽을 형편도 되지 못하였다. 학원사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문고판 책을 발행하였는 데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인근 부대 연대장님이 학원문고를 한 질 학교에 기증을 하였다. 이 책이 학교 도서실(자료실)에 있었는 데 나는 이 책에 빠져 들었다. 아버지의 빽(?) 덕분에 일요일에도 학교에 가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때 읽은 책으로 기억이 나는 것은 ‘솔로몬의 동굴, 암굴왕, 보물섬, 타잔, 검은별’ 등이었는 데 이 책들은 시골 소년인 나를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여 주는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의 우리 또래들이 교과서 이외의 책을 접하기 어려운 시절을 살았지만 책에 목말라 했던 나는 그 뒤 마음에 드는 책을 보면 책을 내 소유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지라 한권 한권 사모은 책들을 꽂을 꽂아둘 공간이 없어서 상자에 넣어 베란다에 쌓아 두고, 그래도 안되면 잘 안보는 책을 버리기까지 하는 처지가 되었다.
4. 방물장수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지고)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주로 40대 - 50대의 아주머니들로 기억이 되는 데 이런 장사꾼들을 방물장수라고 불렀다.
시골 마을에는 이런 방물장수들이 자주 왔다.
방물장수 아줌마들은 여름에는 커다란 마루가 있는 집에서 보따리를 폈다.
그러면 동리의 아줌마들이 몰려 왔고 이곳에서 물건에 대한 흥정이 벌어졌다.
방물장수 아줌마들의 보따리 속에서는 가지가지 물건들이 나왔다.
옷감, 바늘, 실, 수실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들과 소화제, 키니네 등 상비 약품들도 있었다. 방물장수 아주머니들은 한 마을에서 물건을 팔고 다음 마을로 걸어서 이동하였다. 여관에서 자면서 물건을 팔면 남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 아주머니들은 동리의 어느 집을 정하여서 하루를 묵었다.
우리 집은 방물장수 아주머니들이 묵어 가는 장소였다.
어머니는 이분들을 재워 주었고, 식사도 대접하였다. 방물장수 아주머니들은
이렇게 우리집에서 하루를 먹고 자고, 떠날 때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바늘이나 수실 등을 답례로 주고 갔다.
당시 우리집이 넉넉한 형편은 되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는 찾아오는 객들을 그냥 보내지 않으셨다.
걸인들에게는 보리쌀이라도 주어서 보냈다.
어느 날에는 아이 셋을 데린 엄마가 동냥을 왔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상을 차려서 밥을 주었다.
아이들은 허겁지겁 밥을 먹고 먼저 먹은 아이들은 풍선을 가지고 놀다가 서로 싸우고... 이를 본 엄마는 아이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는 방물장수들은 예전에는 중요한 정보원이었다고 한다. 한 마을의 사정들을 다른 마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고, 중매를 하는 매파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80년도에도 내가 근무하던 시골에는 보따리를 이고 다니는 방물장수 할머니가 있었다.
아마 이 분이 마지막 방물장수였으리라.
민속화 - 조선시대의 방물장수
어린 시절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였던 일들이 이제는 사라져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고, 우리는 이것을 따라잡기에도 벅찬 세대가 되었다.
2005. 8. 15 춘천고등학교 40회 동창회 카페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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