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학교에서 사라진 것 중의 하나가 기생충검사다. 내가 영화를 본 것으로 처음 기억나는 것이 기생충에 관한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되는 데(아니면 취학 전일 수도 있음) 기생충 예방에 관한 영화인 것으로 기억난다. 내용은 전혀 기억이 없지만 화면 속에 어느 기생충의 모습을 보았던 것만은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국민 모두가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교과서(과목은 기억이 나지 않음)와 중학교 교과서(생물로 기억됨)에는 기생충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수록이 되어 있었다. 기생충의 그림과 감염경로, 구충과 예방방법이 있었는데 전염병에 관하여서도 교과서에 나와 있었다. 당시 국가적 차원에서 기생충 퇴치와 전염병 예방에 힘을 기울였던 것은 그만큼 이들 문제가 심각하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1958년) 뇌염이 크게 유행하였다. 당시 필자가 살고 있던 복받은 땅 강원도 양구에는 뇌염이 침범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20일 가까운 기간을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다. 그해 뇌염의 대 발생으로 2000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정확한 기억은 아님)
하여튼 우리나라의 기생충 감염률이 '60년대 초 당시에는 세계 최상위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생충 왕국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었다고 하니 정부에서도 기생충 예방 홍보에 애를 썼다. 당시 기생충 감염률이 높았던 것은 인분을 비료로 썼기 때문이다. 인분을 채소밭에 주면 채소는 잎이 시커멓게 되며 잘 자랐다.
그리고 인분으로 재배한 채소는 맛도 좋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위생관념이 부족하여 밭에 인분을 주고, 이 채소를 씻어서 김치를 담가 날로 먹었으니 기생충 감염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1년에 한번인지 두 번인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기생충 검사라는 것을 연례행사로 하였다. 작은 빈 성냥갑 속에 자신의 인분을 콩알만 하게 채취하여 종이에 싸서 넣고 성냥갑 겉면에 종이를 붙이고 학교, 학년, 반 이름을 써서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기간이 지나면 기생충 구충제를 복용시켰다. 반의 모든 아이들이 산토닝(회충 구충약)을 복용하였던 것을 보면 필자가 생활하였던 시골에는 100%가 기생충에 감염되었었을 것이다.
약을 먹지 않고 버리는 녀석들이 있었는지 선생님은 주전자에 물을 떠다가 교탁위에 놓게 하시고 한 명 한 명 불러내어 선생님 앞에서 산토닝을 먹게 하셨다. 약을 복용하게 하고는 결과 확인을 위한 지시를 하셨다. 당시만 하여도 선생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우리는 선생님의지시를 한 치도 어기지 않고 재래식 변소(초가로 얽은 변소- 가운데에 기다랗게 얕은 구덩이를 파고 발판이 될 판자를 놓은)에서 대변을 본 후 막대를 가지고 휘저어서 배출된 회충의 숫자를 세었다.
굵은 지렁이처럼 생긴 흰색의 회충은 살아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고지식하게 마리수를 센 우리는 등교 후 자기가 센 회충의 마리 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회충이 많이 나온 녀석들은 의기양양하게 자랑을 하였고 그중 배출된 숫자가 적은 나는 풀죽은 소리로 내가 센 회충의 숫자를 이야기하였다. 선생님은 회충의 숫자를 물으셨고 많이 나온 녀석들은 의기양양하게 번쩍 손을 들었는데 적게 나온 놈들은 사방으로 눈치를 보면서 힘없이 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때부터인지 비닐로 된 채변봉투를 내어 주어 성냥갑에다가 채변을 하여 내던 일은 없어졌지만 변 검사는 아주 귀찮은 일이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회충의 마리수를 가지고 자랑하는 녀석들도 없었고 더 이상 선생님이 배출된 수를 묻지도 않으셨다.
당시 떠돌이 약장사들 중에는 뱃속에서 꺼냈다는 회충 덩어리를 표본병에 넣은 것과 1000마리가 되는 회충이 나왔다는 어느 소년의 회충 덩어리 사진을 족자처럼 만들어 걸어 놓고 모인 청중들에게 기생충에 관한 폐해를 열변을 토해가며 설명을 하면서 구충제를 팔기도 하였다.
1974년 모교에서 첫 교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가장 큰 고역의 하나가 기생충 검사였다.
체육부장이 채변 봉투를 걷었는데 하루에 모두 내지 않으면 이것을 교실 어디엔가 100%를 거둘 때까지 보관을 하여 두어야 한다. 따라서 채변 봉투를 내어준 다음 날 100%를 걷어야만 했다.
그러나 하루에 100%가 완수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깜박 잊은 녀석도 있고, 변이 나오지 않아서 제출하지 못한다는 녀석도 있었다. 그때는 물리적인 강압이 동원되었다. 변이 안나온다는 녀석은 친구가 배를 치약처럼 눌러 짜서라도 변을 채취하라는 엄명이 내렸고, 그래서도 안되면 불우이웃 돕기를 하라고 하고 안낸 녀석들을 물리적인 강압으로 몰아붙이면 다음 시간에는 결석한 녀석들의 것까지100%가 제출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쯤이면 결과가 통보되었는데 감염률은 50%정도로 필자가 중학생 때인 10년 전보다는 훨씬 떨어져 있었다. 구충제를 나누어 주고 앞에서 복용하게 하였지만 더 이상 마리수를 보고하는 일은 없었다.
그 후 해가 갈수록 감염률은 줄었고 '80년대 중후반 들어서는 5% 이하로 줄어 한반에 두, 세 명정도만 감염자가 나왔고 '90년대가 되면서부터는 기생충 검사 자체가 없어져 버려 이제 채변 검사는 전설 속의 일화로 남게 되었다.
몇 년 전엔가 일본 어느 의과대학의 기생충학 교수가 촌충에 대하여 임상 연구를 하려는 데 기생충 감염자를 찾을 수가 없어서 촌충을 찾아 나섰지만 이 역시 쉽지를 않았다고 한다. 꽤 여러 날 동안 정육점을 찾아 헤매다가 겨우 촌충에 감염된 육류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는 누구에게 실험을 하기도 어려워서 자신의 몸에 촌충을 감염시키고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다이어트 효과도 부수적으로 보았다고 하는 데, 하여튼 나라에 따라서는 기생충이 매우 귀한 존재가 되었다.
이는 영농 방법과 위생상태가 개선되었고 생활수준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기생충 및 전염병에 관한 내용도 과학교과에서는 이미 30여년 전부터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인구문제와 환경문제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90년대부터는 인구문제가 과학교과에서 빠져 나갔다.
전염병도 청소년들에게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1958년 뇌염의 유행을 예를 들면 아이들은 20여일간 휴교를 하였다는 사실을 부러워한다. 재작년 홍역이 유행하였을 때 학교를 쉬기 위하여 일부러 홍역에 감염된 녀석들이 있었다. 홍역을 두려워한다면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눈병이 유행될 때 고의로 감염이 되어 학교를 쉰 녀석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눈병에 걸려 학교에 나가지 않는 것이 아마 더 낫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안과의원을 하는 친구의 말을 들어 보면 작년에 병원에 와서 눈병에 감염되지 않았다고 하자 환자가 버린 안대를 몰래 눈에 비벼 기어이 눈병에 감염된 녀석까지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의 철모르는 행동에 대하여 딱하다는 생각과 아울러 학교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싫은 곳인가 하는 반성도 하여 보았다. 기생충이 거의 사라지고 후진국 형 전염병 감염이 급감한 것은 그간 우리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여 경제를 발전시켜 생활수준이 향상된 덕분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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