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린 시절의 단상

쓸쓸한 너무나 쓸쓸한 장례 행열

 

중학교 2학년 때의 일로 기억된다.

내가 살고 있던 창리 마산 마을에서 양구 남면 소재지인 용하리 쪽으로 1.5km쯤 가다 보면 청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두경이라는 같은 반 친구가 살고 있었다.

두경이의 어머니는 시골 아낙네로는 드물게 중학교까지 다녔다는 분으로 양구에서 두경이와 두경이 어머니와 내가 같이 걸어서 집으로 가는 데 두경이가 어머니에게 간판에 나오는 한자를 물으면 척척 대답하여 주시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늦가을 어느 토요일 오후 두경이네 집에 놀러 갔었다. 

두경이와 같이 송우리 검문소(양구 동면과 인제 관대리로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있던) 부근에서 어떤 장의 행렬을 목격하였다.

당시 시골에서 장례식이라면 만장이 앞서고 상여꾼들이 앞에 선 지휘자의 선창에 따라 구성진 목소리로 "어영차 어어~" 하는 후렴을 복창하면서 상여를 메고 장지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날의 장례 행렬은 보통의 경우와 달랐다.

대개의 경우 상여는 아침에 나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날의 장례 행렬은 오후 3-4시는 되어서 장지로 향하고 있엇다.

특이한 것은 상여도 없었고, 장송곡도 없었다.

어른 네명이 들것을 들고 앞장을 서고 있었고, 그 뒤에 남자 어른과 아이들 몇이 뒤따르고, 맨 뒤에 삽과 괭이를 멘 남자들 몇명과 아낙네 몇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상여가 없는 장례 행렬은 당시 시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른이 아닌 아이가 죽은 경우는 상여가 없이 운구해다가 매장하였겠지만 장례 행렬로 보아서 어른이 틀림이 없었다.

당시에는 보통과 다른 장례 행렬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 장례 행렬의 모습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고인은 누구였을까?

왜 상여로 운구되지 못하고 쓸쓸하게 들것에 실려서 무덤까지 가야 했을까?

초라한 차림의 남자와 남루한 옷을 입은 아이들 몇이 뒤따르는 것을 볼 때 고인은 아이를 기르는 엄마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정도의 나이인 것으로 보아 40세를 넘지 않은 젊은 엄마였을 것이다.

 

당시 양구에는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양구읍에 가서 팔거나 고철을 수집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여름에는 고철 수집이나 품팔이를 하였고, 겨울에는 나무 장사를 했다.

나무를 해다 파는 것은 중노동이었다.

겨울철 새벽 날이 새기도 전에 리야카를 끌고 두무리라는 곳으로 갔다.

이곳에서 나무를 베어서 적당한 크기로 자른 다음 리야카에 싣고 집으로 왔다.

이 나무를 쌓아 놓았다가 도끼로 통나무를 쪼개어 장작을 만들었다.

이 장작을 내다 파는 것은 아낙네들의 몫이었다.

여자들이 새벽 날이 새기 전에 리야카에 장작을 싣고 읍내로 향했다.

여자들이 장작을 싣고 간 것은 경찰에게 적발되는 경우(당시에 도벌에 대한 감시가 있었다) 경찰이 나무를 압수하는 데

여자들이 울부짖으며 사정을 하면 압수를 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마 들것에 실려 운구되는 것을 볼 때 고인과 그 가족은 마을의 원주민은 아닐 것이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마을에 흘러 들어와서 어느 집에 방 한칸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엄마가 중병에 걸렸을 것이고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남편과 어린 아이들을 남겨 놓고 세상을 등졌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두고 떠나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엄마를 잃은 어린 아이들의 마음은??? 졸지에 홀아비가 되어 어린 아이들을 떠맡게 된 가장의 심정은???

워낙 가난한 처지이고, 마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격식을 갖추어 상여로 장례식을 치를 형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이웃 사람들 몇몇이 들것으로 운구하여 산역을 하여 시신을 매장하여 주었을 것이다.

내가 목격했던 쓸쓸한 장례 행열은 위와 같은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

 

그후 40년이 지났다.

춘천 학곡리 장례 예식장에서 고교동창인 J의 아버지의 장례가 있었다.

J의 동생이 굴지의 의류회사 사장이었다. 또, 형제들도 여러명이었다.

장례 예식장 입구부터 빈소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화환이 여러 줄로 도열하여 있었다.

무슨 백화점, 백화점.... 전국에 있는 백화점의 화환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얼추 세어보니 300개가 넘었다.

빈소는 문상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내 머리 속에는 셀 수 없이 늘어선 화환들의 모습과 초라한 장례 행렬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쓸쓸한 장례 행렬의 주인공과 수많은 사람들의 조문과 하직 인사를 받고 떠나는 분의 차이는 무엇일까?

상여로 운구되지도 못하고 들것에 실려 쓸쓸하게 매장이 된 사람과 얼마 전 사망을 해 온 국민의 애도와 통곡(?) 속에서 여러날 동안 조문을 받고, 성대한 장례식을 거쳐 시신이 자연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미라가 되어 계속 경배를 받을 김정일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떠나는 과정이 어떻든 간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