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8.15 광복절 61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60여년간 우리나라의 변화에 대한 특집 방송이 KBS 1TV에서 있었다. 반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에 6.25라는 참상과 독재시절을 겪으며 우리나라가 성취한 업적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고 이제 우리나라의 경제와 문화의 힘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것에 대하여 큰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해방후 60여년의 시기 중 50년 가까운 시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우리의 자식 세대에서는 우리 시대의 삶을 이야기하여도 먼 태고적 이야기로 실감을 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삶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색이 바래가다가, 지금까지 그러하였듯이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것과 함께 잊혀져 갈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잊혀져 가는 기억의 창고에 쌓여있던 기억 중의 일부를 꺼내고자 한다. 함께 자란 우리 동기들은 나의 글을 통해서 잠시나마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의 어린 시절로 여행을 하기를 바란다.
1. 우유가루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은(1956년) 휴전이 된 후 3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로 전쟁후 삶이 힘들었을 때였다.
그때 우리는 미공법 480호에 의한 잉여농산물에 의지하여 먹거리를 해결해야 하였다. 이때 어린이들에게 배급된 것이 탈지분유였다. 탈지분유는 당시로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비닐푸대에 쌓여서 1m 높이 정도가 되는 큰 둥근 통에 담겨서 학교로 배급되었다. 선친이 초등학교 교사였던 나는 우유가루 배급의 전과정을 볼 수 있었다. 이 우유가루 통은 아래와 위의 둥근 테가 철제로 되어 있었고, 둘레에 해당되는 부분은 두꺼운 종이가 여러 겹으로 접착되어어 만들어진 것으로 아주 튼튼하였다.
이 우유가루 통은 나중에 우리집으로 와서 잡동산이를 담아두는 통이 되었고, 이사를 할 때면 짐을 싸는 데 요긴하게 씌였다.
50년이 된 우유가루 통 하나가 아직도 우리집에 남아 잡동산이를 담아두는 데 사용되고 있다.
우류가루를 배급주기 전날 선생님은 가루를 담아갈 그릇을 준비하여 오라고 전달하였다.
애들은 주로 보자기를 가져 왔다. 선생님은 우유가루를 한 양재기씩 퍼서 주면 아이들은 보자기에 가루를 받아서 쏟아질새라 잘 들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당시에는 우유가루를 더운 물에 타서 먹을 줄을 몰랐던 것 같다.
선친께서 초등학교 교사라 당시로서는 좀 깨였다고 하는 우리집에서도 분유를 먹을 줄 몰랐으니 그렇지 못한 가정에서야...
이 우유가루는 밥을 할 때 밀가루 반데기처럼 쪄서 먹었다.
갖 쪄냈을 때는 달착지근한 것이 부드럽고 맛이 있었지만 문제는 식은 후였다. 이것이 식으면 돌처럼 단단해졌다. 식은 우유가루 덩어리는 토끼가 나무토막을 갉듯이 잇빨로 갉아 먹어야 했다. 우유가루를 나누어 준 다음 날이면 교실에는 우유가루 덩어리를 갉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초등학교 1학년 당시에는 교사들에게 쌀을 배급주었다. 보리쌀도 같이 배급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쌀은 알랑미라는 것이었다. 이 알랑미는 원래 베트남에서 생산된 쌀이라는 뜻의 안남미가 발음이 변하여 된 것으로 학술적으로 말하면 Indica 품종의 쌀로 알이 길고 찰기가 없는 쌀로 동남아 지방에서 주식으로 하는 것으로, 쌀알의 길이가 짧고 찰기가 있는 Japonica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는 쌀이다. 어른들이 알랑미쌀이라고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은 나지만 어린 시절이라 쌀맛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다만 중국에 여행을 갔을 때 나온 밥이 푸석푸석하고 찰기가 없어 입맛에 맞지 않았는 데 이것을 통해 알랑미에 대한 밥맛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초둥학교 3학년때 양구로 이사를 왔을 때 군부대에서 식사 나팔을 불 때 멜로디에 “밥은 밥은 알랑미밥, 국은 국은 된장국, 식기 전에 빨리 먹어라”라는 가사를 붙여 불렀던 기억이 난다.
1970년대 중반 통일벼가 다수확 품종으로 장려될 때, 통일벼의 밥맛이 좋지를 않아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하고 다른 품종으로 대체된 것은 이미 우리나라의 식량사정이 좋와져서 단순히 굶주림을 모면하는 데서 맛을 따지는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밥에 찐 우유가루에 대한 추억은 우리 세대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다가 잊혀져 갈 것이다.
2. 옥수수 가루
학교에 우유가루의 배급이 있은 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배급된 것이 옥수수가루였다. 노란색의 옥수수 가루는 푸대에 담겨져 왔는 데 우유가루처럼 모든 학생들에게 배급된 것이 아니고 가난한 어린이들에게만 배급이 되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우리학교(양구 원당초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있었다. 정효섭이가 축구부였는 데 축구부원들에게는 운동 연습이 끝난 후 학교에서 옥수수가루로 죽을 쑤워서 한 양재기씩 주었다. 몸치라 축구부에 끼지 못했던 나는 축구부원들이 옥수수죽을 먹는 것을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이 학교에서 옥수수빵을 받아 왔었다. 동생들은 이 옥수수빵을 돼지빵이라고 불렀다. 애들 중에는 이 빵이 맛이 없다고 버리는 경우가 생기게 되고, 옥수수빵은 밀가루 빵으로 대체 되다가 어느 핸가 서울에서 급식빵 식중독 사고가 난 후 학교에서 빵을 배급하는 제도는 사라졌다.
3. 밀밥
초등학교 6학년때였다. 양구 동면 월운리에 큰 저수지가 건설되고 이 물을 남면 가오작리까지 끌어 오는 수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때에는 수로 공사를 장비를 쓰지 않고 인력으로 하였기 때문에 많은 인부들이 몰려왔다. 내가 살던 지석리에도 이렇게 유입된 사람들이 많았는 데 가족을 데리고 온 분들도 있어 이분들의 자녀들이 우리와 함께 초등학교에 같이 다니게 되었다.
김수성이라는 아이도 이렇게 하여 우리와 함께 학교에 다니게 된 아이였다.
아버지가 신문기자였다고 자랑을 하였는 데, 어찌된 일인지 공사판에서 일을 하는 인부였다.
한달에 한번 공사판에서 일한 인건비는 통밀로 지불을 하였다. 밀푸대에는 두 손이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미국 국민이 보내준 밀’이라는 글씨가 씌여져 있었다. 공사판 인부들은 이 밀을 방앗간에서 빻아 밀가루로 만들어 먹기도 하였지만 여의치 않으면 밀밥을 해먹기도 하였다.
수성이는 밀밥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왔다. 어느날엔가 수성이 도시락과 내 도시락을 바꾸어 먹게 되었는 데 쌀 한톨 섞이지 않은 식은 밀밥이라 찰기가 없어 흩으러져서 젓가락으로는 뜰 수가 없었고, 씹히는 맛도 꺼끄러워 먹을 수가 없었다. 아마 수성이는 이 밀밥으로 끼니를 때웠으리라.
4. 다이나마이트
수로 공사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 들어 일을 하였다. 한 키가 되는 깊이로 도랑을 파고, 역 사다리꼴로 수로를 만들었는 데 모두 인력으로 작업을 하였다. 딱딱한 땅은 곡괭이로 파내고, 가래질을 하여 파낸 흙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딱딱한 암반이 나오는 경우는 다이나마이트를 폭파하여 암반을 파괴하고 공사를 하였다. 다이나마이트(당시는 남포라고 하였다)를 폭파시킬 때면 사람들을 모두 멀리 대피시키고 폭파를 시켰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서 폭파 장면을 지켜 보았는 데, 엄청난 굉음이 나면서 돌맹이 들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가고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1980년엔가 내가 근무하던 횡성 갑천 지역에 도로포장공사가 있었다.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을 하는 꽤 큰 공사였는 데, 장비 몇 대와 덤프 트럭 몇 대가 일을 하였고, 삽을 든 인부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폭파를 한다고 하여 지켜 보았는 데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바윗 덩어리가 솟구치는 생각을 하고 바라 보았지만 ‘퍽’하는 소리만 났고, 암석의 파편은 튀지도 않으면서 폭파작업이 완료되었다.
20년 사이에 많은 발전을 하였던 것이다.
5. 자유의 벗 잡지
초등학교 시절(‘70년대 초까지 발행되었다고 함) 자유의 벗이라는 잡지가 발행되었다. 미 공보처에서 발행하는 잡지였는 데 지금의 B4 크기의 규격으로 나온 책이었다. 당시 교과서는 누런 갱지로 만들어졌었고, 흑백으로 된 삽화가 실려 있었지만 이 자유의 벗은 빳빳한 고급 종이로 제작이 되었고 천연색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는 호화판 책이었다. 쪽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 얇은 잡지였는 데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것은 베트남 전에 대한 화보와 파나마 모자를 만드는 공장에 대한 소개였는 데 아마 미국의 정책 홍보와 전후 복구에 대한 내용, 미국 문화에 대한 소개가 내용의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 자유의 벗은 교과서 겉장을 싸는 데 이용이 되었고, 봉투를 만드는 데 이용이 되기도 하였다.
양초를 포장하는 종이는 예외없이 자유의 벗에 덧씌우기 인쇄를 한 것이었다. 이 자유의 벗은 처음에는 학생들마다 한권씩 배급을 주던 것이 나중에는 학급이나 학교 단위로 보급이 되다가 다른 책들이 많이 나오면서 폐간되었다.
6. 학원사 문고
우리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가장 인기가 있는 잡지는 학원이라는 잡지였다. 학원사에서 발행되던 잡지였는 데, 시골에 있는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어쩌다가 한권을 보면 재미가 있었는 데(특히 연재 소설과 만화는 재미 있었다) 책을 구할 수가 없어서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대한 궁금증만 남기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학원이라는 잡지를 사볼 형편도 되지를 못하였고, 시골이라 이 책을 읽는 친구도 없으니 빌려서 읽을 형편도 되지 못하였다. 학원사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문고판 책을 발행하였는 데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인근 부대 연대장님이 학원문고를 한 질 학교에 기증을 하였다. 이 책이 학교 도서실(자료실)에 있었는 데 나는 이 책에 빠져 들었다. 아버지의 빽(?) 덕분에 일요일에도 학교에 가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때 읽은 책으로 기억이 나는 것은 ‘솔로몬의 동굴, 암굴왕, 보물섬, 타잔, 검은별’ 등이었는 데 이 책들은 시골 소년인 나를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여 주는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의 우리 또래들이 교과서 이외의 책을 접하기 어려운 시절을 살았지만 책에 목말라 했던 나는 그 뒤 마음에 드는 책을 보면 책을 내 소유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지라 한권 한권 사모은 책들을 꽂을 꽂아둘 공간이 없어서
상자에 넣어 베란다에 쌓아 두고, 그래도 안되면 잘 안보는 책을 버리기까지 하는 처지가 되었다.
7. 방물장수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지고)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주로 40대 - 50대의 아주머니들로 기억이 되는 데 이런 장사꾼들을 방물장수라고 불렀다.
시골 마을에는 이런 방물장수들이 자주 왔다.
방물장수 아줌마들은 여름에는 커다란 마루가 있는 집에서 보따리를 폈다.
그러면 동리의 아줌마들이 몰려 왔고 이곳에서 물건에 대한 흥정이 벌어졌다.
방물장수 아줌마들의 보따리 속에서는 가지가지 물건들이 나왔다.
옷감, 바늘, 실, 수실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들과 소화제, 키니네 등 상비 약품들도 있었다. 방물장수 아주머니들은 한 마을에서 물건을 팔고 다음 마을로 걸어서 이동하였다. 여관에서 자면서 물건을 팔면 남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 아주머니들은 동리의 어느 집을 정하여서 하루를 묵었다.
우리 집은 방물장수 아주머니들이 묵어 가는 장소였다.
어머니는 이분들을 재워 주었고, 식사도 대접하였다. 방물장수 아주머니들은
이렇게 우리집에서 하루를 먹고 자고, 떠날 때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바늘이나 수실 등을 답례로 주고 갔다.
당시 우리집이 넉넉한 형편은 되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는 찾아오는 객들을 그냥 보내지 않으셨다. 걸인들에게는 보리쌀이라도 주어서 보냈다.
어느 날에는 아이 셋을 데린 엄마가 동냥을 왔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상을 차려서 밥을 주었다. 아이들은 허겁지겁 밥을 먹고 먼저 먹은 아이들은 풍선을 가지고 놀다가 서로 싸우고... 이를 본 엄마는 아이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는 방물장수들은 예전에는 중요한 정보원이었다고 한다. 한 마을의 사정들을 다른 마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고, 중매를 하는 매파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80년도에도 내가 근무하던 시골에는 보따리를 이고 다니는 방물장수 할머니가 있었다. 아마 이 분이 마지막 방물장수였으리라.
민속화 - 조선시대의 방물장수
어린 시절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였던 일들이 이제는 사라져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고, 우리는 이것을 따라잡기에도 벅찬 세대가 되었다.
이제 앞만 보고 달려가던 시대에서 가끔은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여유를 가져야 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나의 이 글이 잊혀져 가는 추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05. 8. 15. 춘천고등학교 40회 동창회 카페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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