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의 버스 종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위치에 있다.
터미널 건물과 주변의 건물은 바뀌었지만 위치는 변함이 없다.
'60년대 초반의 버스 터미널의 모습은 본질적인 면에서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차표를 판매하는 창구와 승객들이 대기하는 대합실이 있고, 편의 시설로 매점과 화장실이 있었다.
본고에서는 화장실을 중심으로 기억을 더듬어 볼까 한다.
양구 시외버스 터니널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때의 일이다.
아마 속초에서 춘천으로 가는 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부친이 속초에서 근무를 하셨기 때문에 속초에서 춘천에 가려면 양구를 거쳐서 갔던 것 같다.
큰댁이 춘천이었고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할머니를 뵈러 방학때 춘천에 갔던 것 같다.
아버지와 같이 춘천에를 갔던 것 같은 데 차가 양구에서 정차하였다.
버스에는 푸른 죄수복을 입은 죄수가 교도관과 같이 승차하고 있었다.
후에 교도관으로 근무하는 동생 친구의 아버지께 경험을 말씀 드렸더니 당시에는 일반 버스로 죄수를 호송하는 일들이 있었다고
했다.
죄수와 같은 차를 타고 온 것 같은 데 중간의 기억은 없고 양구 터미널에서의 기억만 남는다.
아마 점심때였던 것 같다.
교도관이 죄수에게 찐빵을 사다 주었다.
포승줄에 묶여 있는 죄수는 빵을 먹으며 "이것이 양구 빵인가?"라고 말한 것이 정확히 기억난다.
이것이 양구 시외버스 터미널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다.
그후의 기억은 양구로 이사온 뒤의 기억들이다.
터미널에는 휴가를 가는 군인들로 붐볐다.
헌병들이 수시로 순찰을 도는 모습도 기억난다.
터미널 광장에는 수족관이라고 써붙인 민물고기를 파는 곳이 여러곳이 있었다.
널빤지로 물이 새나가지 않게 사각형의 틀을 만들고 펌프로 물을 퍼넣어 틀을 채우고 그곳에 잡아온 민물고기를 가두어 놓고 판매를 했다.
당시 파로호에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힌 것 같았다.
붕어, 잉어, 메기, 뱀장어, 쏘가리 등을 팔았는 데 어떤 잉어는 어린이의 키만큼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뱀장어도 얼마나 큰지 대야에 담아 놓은 것이 똑바로 있지를 못하고 똬리를 틀은 것처럼 몸을 구부리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뱀장어는 알을 낳으러 바다로 가야 하고, 새끼 뱀장어가 필립핀 부근의 바다에서 부화된 후 다시 어미가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데
댐으로 막혀서 자연적으로는 양구에 올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의 뱀장어는 예전 댐이 생기기 전에 올라왔던 개체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양식한 뱀장어를 방류한 것이 잡힌다고 한다.
'74년 양구중에 교사로 부임하여 근무할 때도 시외버스 터미널에 위에서 말한 수족관이 있었다.
한번은 우리반의 성적이 4개 학급 중 가장 좋와서 터미널의 어느 식당에서 잉어 요리를 대접한 적이 있다.
아마 '70년대 말쯤 시외버스 터미널의 광장에 있던 물고기를 파는 수족관이 철거되었을 것이다.
터미널 부근에는 많은 식당들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터미널까지 걸어 와서 버스를 타고 동면 지석리의 집을 귀가를 했는 데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 냄새는 식욕을 자극했지만 한번도 터미널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은 적은 없다.
초등학교때의 여름일 것이다.
식당들은 문을 열어 놓고 영업을 했기 때문에 안에서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짜장면을 먹고 있는 모습이었는 데 국수에 시커먼 자장을 비비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조청을 비비는 것으로 보였다.
국수를 조청에 비벼 먹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짜장면을 먹었던 것은 중학교를 들어간 이후의 일로 기억된다.
동면 팔랑리에 가서 아버지의 친구분(양구에서 유명한 지금은 작고한 김광빈의 부친)과 같이 산해루라는 중국집에서 처음 짜장면을 먹었던 것이 짜장면을 먹은 최초의 기억이다.
혹 전에 먹은 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처음의 기억은 중학교 1학년때 처음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비껴나갔는 데 다시 본래의 글로 돌아오고자 한다.
버스 터미널 부근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의 모습은 달라져도 세계 어디나 버스 터미널에 화장실은 있기 마련이다.
'50-'60년대 당시의 화장실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판자로 엉성하게 지은 가건물 비슷한 건물을 여러 칸으로 칸을 나누어 놓았다.
남자용과 여자용 화장실이 구분되어 있는 것은 지금과 같았다.
남자들이 소변을 보는 곳은 지금처럼 소변기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소변이 흘러내려갈 수 있는 고랑만 있고 벽을 향하여 소변을 보아야 했다.
오줌줄기가 닫는 벽의 하단부나 오줌이 흘러 내려가는 고랑에는 늘 하얀 백태가 끼어 있었다.
여름이면 지린내가 코를 찔렀지만 이를 불평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소변보는 곳은 큰 것을 해결하는 곳보다는 상황이 훨씬 양호했다.
큰 것을 보는 곳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여름에만 개장하는 유원지의 임시 화장실에서 더러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당시 모든 공중변소는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여름에는 악취가 진동했다.
변기통 아래를 내려다 보면 수많은 파리 후보생들이 우글거렸고, 이들이 변기통을 타고 올라와서 구물구물 기어다녔다.
어쨌든 볼일을 보아야 하니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볼일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악취를 잊게 하는 것이 벽에 쓰여 있는 낙서였다.
벽에는 수많은 낙서가 쓰여 있었다. 수시로 관리자가 지웠지만 칠을 한 위에 또 낙서가 덧칠을 했다.
내용은 대부분 음담패설이었다.
남녀의 성기의 모습을 간략화하여 그린 것이거나, 이것이 결합된 모습을 그린 포로노(?) 그림들이 많았다.
야설도 있었는 데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친구네 집에를 갔는 데 친구와 부모는 없었고 친구 누나가 목욕을 하고 있었는 데 자기를 유혹해서 운운하는 내용 같은 스토리들이었다.
성적 호기심이 많은 사춘기에 이런 글들을 읽다 보면 냄새도 잊고 볼일을 볼 수가 있었다.
또 남자를 구한다는 여자들의 주소와 이름과 연락처도 있었는 데 모두 허위거나, 낙서를 한 녀석이 자신이 아는 동급생이나 같은 마을의 아가씨들의 인적 사항을 멋대로 적어 놓은 것이었으리라.
한적할 때는 낙서를 읽기 위해 일부러 화장실마다 문을 열고 들여다 보기도 하였다.
경제가 발전하고 주거 문화가 개선되고 화장실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터미널의 화장실 모습도 바뀌어 갔다.
소변기가 설치되었고, 화장실 벽과 바닥도 타일로 만들어 더 이상 낙서를 하기가 어렵게 하였다.
수세식으로 바뀌어 파리 후보생을 목격하거나 더 이상 악취에 시달리지 않도록 하였다.
지금도 버스를 이용하기 위해 터미널에 갈 때마다 옛날 버스 종점의 모습이 가끔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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