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초등학교 3학년때인 여름에 부친의 전근으로 양구로 오게 되었다.
광덕초등학교 3학년으로 전입하여 5학년 올라갈 때까지 다녔다.
5학년이 되고 나서 부친의 전근으로 원당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원당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1961년은 5.16이 난 해다.
그해 12월에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았다.
학교별로 시험을 보았지만 전국이 같은 문제로 시험을 치른 국가고사라고 했다.
두 학급 120명(남녀)을 뽑았는 데 150명 정도가 응시하여 30명 정도가 낙방을 하고 120명이 합격을 하였다.
우리는 26명이 졸업을 했는 데 두명이 춘천중학교로 가고(재수생 1명을 포함 3명), 절반 정도가 양구중학교로 갔고 성애중학교로 몇명이 진학을 했다. 여학생은 일곱명인가가 졸업을 했지만 2명만 양구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지석리 괸돌(고인돌) 마을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니 버스 통학을 해야 했다.
양구읍내조차 갈 기회가 없어 차를 탈 일이 없었던 때라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마음 설레는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등교하니 신이 났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며칠뿐 곧 버스통학이 피곤하고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버스는 동면 종점에서 아침 6시, 7시, 8시에 출발하였다.
8시 다음 차는 11시에 있었고, 하루에 일곱차례인지 동면과 양구를 오가는 버스가 있었다.
학교 수업은 9시에 시작되었는 데 9시 이전에 등교를 하면 되었다.
8시 조금 넘어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타면 10분전 9시쯤 학교에 도착하였다.
동면과 남면 가오작리, 용하리까지는 대부분 버스를 타고 갔지만 송우리부터는 대부분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남학생 선배들 중 일부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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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학 버스는 만원 콩나물 버스였다.
용하리쯤 가면 완전히 발디딜 틈도 없이 만원이 되었다.
중간에 누가 내리려면 출입문 부근에 탄 사람들이 같이 내렸다가 다시 승차해야 했다.
당시 버스에는 운전수(당시는 운전기사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조수, 차장 이렇게 3명이 승무원으로 일을 했다.
버스의 출입문은 두곳이 있었는 데 앞문에서는 차장이 돈을 받고 손님을 태웠고 뒷문에서는 조수가 탔는 데 조수는 짐을 싣고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운임을 받는 일을 했다.
발디딜 틈이 없이 사람을 가득 태웠는 데 안으로 들어갈 틈이 없으면 차장은 문을 닫지 못하고 두팔로 매달린 채 버스가 출발해야 했다.
운전수는 커브를 돌을 때 한번 씩 웃고는 회전각도를 크게 해서 커브를 돌면 비명소리가 나면서 버스의 승객들이 안으로 쏠려 들어갔다. 그러면 차장이 문을 닫을 수가 있었다.
8시 통학버스는 매일같이 이런 전쟁을 치뤄야 했다.
아침만큼 만원은 아니었지만 집에 돌아오는 버스도 편한 것은 아니었다.
여름에는 해가 길었고 4-5시 사이에도 뜨거운 열기가 남아있어 푹푹 찌는 날씨였다.
차안에는 사람들이 꽉차서 서로의 체온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완전히 찜통과 같이 되었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다 보면 맞은 편에서 차가 오는 데 차 뒤에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먼지가 났다.
군인 훈련 차량이 대열을 지어 맞은 편에서 오기라도 하면 창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면 차안은 완전히 한증막이 되었다.
용하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렸고 이때쯤서부터는 숨쉴 공간이 생기는 것 같았다.
광치 검문소에서는 헌병들이 올라와서 검문을 하였다.
주로 군인들을 검문하였다.
아침 차에서는 군수품을 단속하는 검문을 하기도 했다.
광치 검문소에서는 꽤 오랫동안 검문을 했는 데 여름에는 창밖에 보이는 개울에서 수많은 물고기들이 뛰어 오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여름에는 한참 해가 남았지만 겨울에는 컴컴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피곤한 하루의 통학이 끝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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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계가 있는 집이 한마을에서도 몇집이 없었다.
어머니들은 시계가 없이도 시간을 맞추어 등교하는 자식들 밥을 챙겨 먹였다.
버스가 마을 가까이 오면 경적을 울렸다.
이 소리를 듣고 나오면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당시 양구에서 동면을 운행하는 버스는 1호차, 251호차, 336호차가 있었고 하루에 한번 경춘여객이 운행하였다.
양구에서 동면 사이를 운행하는 차들은 아주 낡은 차들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경춘여객은 새차였고, 춘천(서울)까지 운행하였다.
세 버스의 운전수들은 모두 개성이 달랐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336 운전수는 나이가 50세쯤 된 분이었다. 나중에 작은 할아버지 친구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1호차와 251의 운전수는 누가 누구인지 헷갈린다.
아마 1호차 운전수로 기억된다. 이분은 기분파였다. 가끔 직선도로에서 속력을 냈다. 비포장도로에서 달리는 것이 한계가 있었겠지만 속력을 내고 달릴 때면 우리는 신이 났다.
251과 336은 툭하면 고장이 났다. 그중 336이 더 고장이 잘났다.
336을 우리들은 빵빵육이라고 했다.
고장이 나면 차를 세우고 차를 고쳤다. 이 일은 조수가 맡아서 했다.
때로는 조수가 가마니를 깔고 차 밑에 들어가서 차를 고치기도 하였다.
겨울에는 깡통을 들고 개울로 뛰어가 얼음을 깨고 물을 떠오기도 했다.
조수가 차를 고치는 속도가 늦으면 운전수가 문을 열고 내다보며 독촉을 했다.
어떤 때는 손님들도 많은 데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구둣발로 조수의 정강이를 까기도 했다.
조수의 옷은 기름때에 절어서 완전히 기름통을 뒤집어 쓴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오후 6시 - 6시반쯤 출발하는 막차로 기억된다. 양구서 놀다가 막차를 타고 집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버스가 동면으로 가다가 고장이 났다. 차를 고쳐서 조금 더 가다 보면 또 고장이 났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9시가 다되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1시간쯤이면 양구에서 동면까지 가는 길을 아마 3시간 가까이 걸려서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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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면에서 양구를 가는 데 학생들은 50환(화폐 개혁후 5원)을 냈다.
한달 월납금이 1400환(140원, 나중에 175원으로 인상)을 했으니 하루에 100환(10원) 하는 버스 요금이 한달에 2500환 정도가 소요 되었으니 버스 요금이 꽤 비싼 편이었다.
당시 쌀 한말에 2000환-3000환쯤 했을 것이다.
기억되는 것은 군인 건빵 한봉지에 50환(5원), 오징어 한마리에 50환(5원), 소주 2홉짜리 한병에 200환(20원)을 했던 것 같다.
성애중학교는 양구중학교보다 학비가 저렴했다. 그래서 중학교에 가기 어려운 집 아이들이 성애중학교를 많이 갔다.
아주 어려운 집에서는 성애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일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립인 성애중학교에서 적은 액수의 교납금을 받아 학교를 어떻게 운영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들의 보수는 어떻게 지급을 했는지???
양구중학교를 다닌 나는 성애중학교 친구들의 어려움을 몰랐지만 이들이 어려운 중에 공부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동복은 같았지만 양구중학교는 흰색 바탕의 명찰을 성애중학교는 검은색 바탕의 명찰을 달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복은 양구중학교는 회색 하의에 흰색 상의를, 성애중학교는 청색의 상의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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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에 막올라왔을 때로 기억된다.
통학생들은 버스에서 내릴 때 돈을 받았다.
앞문에서는 차장이 뒷문에서는 조수가 돈을 받았는 데 누가 먼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버스에서 내리던 통학생들이 돈을 내지 않고 일제히 교문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나도 달리는 군중들의 틈에 끼어 버스요금을 내지 않고 학교 운동장으로 뛰어 들어 갔다.
조수가 욕을 하며 쫓아 왔지만 허사였다.
그날 조수와 차장은 무척 욕을 많이 먹었을 것이다.
겨울에는 냉동고 속 같은 추위 속에서, 여름에는 찜통 더위 속에서 버스 통학을 하면서 처음 버스 통학을 할 때의 설레임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2학년이 되던 해 4월 지석리 괸돌에서 창리 마산으로 이사를 오면서 나의 버스 통학은 끝나게 된다.
당시 송우리 이후의 학생들은 모두 걸어 다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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