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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싸움 구경

 

우리의 생활양식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살아온 시간 중 어린 시절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은 마치 딴나라의 생활처럼 달라지게되었다.

우리가 유년 시절이나 소년 시절에 오늘날과 같은 생활을 생각해 본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우리들 중 누가 차를 몰고 나들이를 다니고, 손에 전화기를 들고 다니며,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컴퓨터 앞에 앉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을까?

너무 빨리 생활양식이 변하다 보니 따라가는 것도 힘들다.

나는 아직도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보낼 줄 모른다.

저장된 메시지를 찾아 읽는 것을 배운 것도 몇달 되지 않는다.

벌써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우리들에게는 추억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지만

자식 세대에게는 먼 옛날 이야기거나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들리게 되었다.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단상들을 끄집어 내어 친구들과 같이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 동심의 시절로 돌아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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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싸움 구경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볼거리가 없었다.

특히 양구 촌놈, 그것도 양구읍에 나오려면 두시간에 한대 꼴인 버스를 타고 1시간은 나와야 하는 촌놈에게는 볼거리가 있을 턱이 없다.

부근의 산과 들과 냇가가 놀이터고, 늘 보는 같은 동리의 또래들과 학교의 동급생  몇명이 놀이 상대의 전부였던 시절, 만나는 사람은 30여호밖에 되지 않는 동리의 사람들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동리의 집 대부분이 초가였던 때였고 집과 집 사이의 울타리는 나무 울타리였는 데 집과 집 사이의 경계만 표시된 것이고 울타리 너머로 이웃집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이웃집 아기의 울음소리까지 들리는 개방된 가옥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부부싸움 하는 소리도 들려서 어느집에서 싸움이 났는지를 금방 알 수 있고

한 집에서 싸움이 나면 마을 사람들 전체가 나와서 구경을 하게 되었다.

 

TV는 물론이고 라디오조차 없었던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이라

싸움은 무료함을 깨는 획기적인 이벤트였다.

여름철, 동리 어느집에서 싸움(부부싸움)이 나면 나는 싸움 구경을 하러 갔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싸우는 모습은 재미있었다.

아줌마는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붓고, 술이 취한 아저씨는 아줌마를 때리려고 하고 나가버리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아이들은 자지러지게 울고...

아저씨는 세간살이를 마구 집어 던지며, 아주머니를 때려 죽인다고 소리를 지르고, 이에 맞서 아줌마도 악담을 퍼부으며 죽이라고 대들고...

 

그러나, 실제로 폭력으로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하려하면 동리 할머니들이 나서서 아저씨를 제지한다.

"김씨 왜 이래!  참아. 참아!"

아저씨는 할머니들에게 붙잡힌 채 소리를 지르고, 아줌마는 악을 쓰고...

 

이쯤에서 수습이 어려울 것 같으면 동리 아주머니들이 아줌마를 데리고 다른 집으로 피신을 시킨다.

아저씨는 다시는 들어올 생각을 말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런데 어린 나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싸우는 모습대로라면 아저씨와 아줌마는 헤어져야 하는 데 다음날 보면 언제 싸웠느냐는듯이

같이 다정하게 일을 하고, 애들도 골목에 나와서 재잘거리면서 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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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싸움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애들 싸움이었다.

툭하면 애들이 싸웠다.

짓꿎은 동네 형들이 싸움을 시키기도 했다.

초등학교 1-2학년쯤 된 녀석인 A에게 가서 B가 너를 이긴다고 하면서 A를 부축이고

B에게는 "A가 너같은 녀석은 한주먹에 날릴 수 있대, 지금 싸우자고 하던데"라고 하면 두 녀석은 진위여부를 가리지도 않고 씩씩대며 다가와서 치고 받고 싸우는데 그 모습이 볼거리였다.

그렇게 싸운 두 녀석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사이좋게 놀고 있고...

 

골목에서 애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어린이 놀이터에도 어린이들이 없는 지금 더 이상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도 싸우는 소리도 듣기 힘들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이들은 싸우며 큰다'라고 하며 아이들 싸움은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조금 다친 정도는 문제삼지 않았지만

지금 아이들의 싸움은 어른들의 싸움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다.

또, 잘 놀다가 의견 충돌로 다투거나 반편성 초기 힘겨루기 수준의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폭행이 많아졌기 때문에 물리적 충돌은 폭력으로 취급되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의견의 차이가 없을 수 없고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 데 어릴 때의 다툼은 이러한 의견 조정과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을 학습하는 효과도 있다는 설이 있다.

낮은 수준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라면 성인이 되어서도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충돌이나 폭행으로 가기 쉽다.

 

 

2005. 11. 15 춘천고등학교 40회 동창회 카페에 올린 글을 수정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