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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가수 샌디김에 대한 추억

 

'70년대 초 가수로 반짝 이름을 날렸던 샌디 김은 양구 출신이다.

그후 프로 권투에 데뷔했다는 소식(불확실한 기억임)도 있었는 데 명성은 오래가지 않고 곧 잊혀진 인물이다.

 

초등학교 축구 대회를 할 때 운동장에서 뛰는 샌디김의 모습을 본 것이 내가 샌디김을 본 최초의 기억이다.

당시만 해도 다문화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 혼혈인 그가 겪었을 아픔은 컸을 것이다.

백인도 아니고 차별을 받고 있는 흑인 혼혈인 그는 더 큰 멍에를 메었을 것이다.

 

'63년 중2가 되면서 우리집은 지석리 고인돌 마을에서 창리 마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전에는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지만 마산에 온 후부터는 걸어다니게 되었다.

그때는 송우리나 용하리에 사는 학생들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학교에 갈 때는 구암리와 황강리의 경계를 이루는 제방길을 지나게 된다.

가끔 등교를 할 때나 하교를 할 때 샌디김과 동행을 할 때가 있었다.

다문화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던 당시 혼혈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이 조금은 있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샌디김을 보통의 친구 대하듯 대하여 주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샌디김이 나보다 학교로는 1-2년 아래였다.

그는 양구 초등학교를 나와 성애 중학교를 다녔다.

그의 어머니는 구암리 마을에서 떨어진 도로와 개울 사이에 있는 집에서 군인들 빨래를 해주거나 옷을 수선해 주는 일을 했던 것 같고 그의 양부는 고물수집을 하며 생활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름은 복천이었고 성은 이씨로 기억되는 데 동기인 김정현 군은 그가 김씨라고 하니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샌디김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 김씨가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65년 고등학교 진학관계로 양구를 떠난 후 샌디김을 만나거나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강원대에 다니던 '71년의 일로 기억된다.

이때는 샌디김이 가수로 데뷔하여 한창 이름을 날릴 때였다.

정확한 가사와 곡은 기억나지 않지만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를 말아라. 서럽게 태어난 이몸.." 아마 이렇게 노래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글을 읽은 독자분께서 그가 부른 노래를 올려준다면 하는 바램이 크다.

샌디김이 부른 노래가 히트를 치고 그의 이름이 알려졌을 때 그가 양구의 샌디김인 줄 알고 무척 반가웠었다.

 

'71년 가을 교내 체육대회를 할 때였다.

경사진 둑에 앉아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데 누가 '형님'하고 부르면서 나에게 뛰어 오는 것이었다.

일어나 보니 샌디김이였다.

너무 반가와 아래로 뛰어 내려가 샌디김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강원대에 왔다고 했다.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좋은 부모님을 만나 오히려 행복하게 성장했다고 대답했다.

그후 그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부모님을 잘만나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냈다고 답하였는 데 양부와 어머니가 가난했지만 샌디김을 사랑으로 잘 길렀을 것이다.

 

몇년 후 모교인 양구중학교에서 근무할 때다.

교회에서 야외예배를 가려고 시내 어느 곳을 걷고 있는 데 샌디김이 나를 불렀다.

샌디김이 양구에 온 것이다. 몇년 만에 반갑게 만났지만 서로의 일정이 있어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후 지금까지 샌디김을 만나지 못하였다.

샌디김이 미국으로 건너 가서 살고 있으며 어머니에게 미국 구경을 시켜 들었다는 기사를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을 뿐이다.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였다.

어느 드라마엔가 샌디김이 출연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아마 야구선수로 나왔다고 했는 데 그 프로를 보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는 사이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안다.

 

'93년 양구중학교에 두번째 근무할 때였다.

수업 시간에 샌디김 이야기를 했더니 한 녀석이 샌디김이 아빠의 친구라고 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데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하고 있고, 양구에 다녀간 적도 있다고 했다.

 

몇년전 샌디김의 소식이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여 보았다.

미국에서 조그만 경비용역 회사를 경영한다고 했다.

강원도민회에도 참석하였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는 미국에 가서 살지만 태어난 고국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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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결혼하는 10쌍 중 한쌍이 다문화 결혼이다.

농촌 지역의 어느 초등학교는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이 더많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경기도 안산의 원곡동은 외국인 거주자 수가 내국인 보다 더많다고 했다.

이미 인구의 2%가 넘는100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자리잡고 살고 있다.

그렇지만 다문화에 대한 차별 의식이 아직도 남아 있어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그런데 50년도 더 오랜 '50년대외 '60년대에 다문화에 대한 그것도 흑인 혼혈에 대한 차별의식이 얼마나 강했을까?

해방후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는 분단 상황 속에서 출생한 샌디김은 강원도 양구에서 성장하였다.

그래도 양부와 어머니가 비록 가난했지만 샌디김을 잘 보살폈고 그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학교에 잘 다녔고 친구들과 잘 사귀었고 고생은 많이 했겠지만 연예인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지금은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다.

이미 그도 칠순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나보다 학교는 늦게 다녔지만 나이는 많았다)

그가  미국에서 활동한 소식을 보면 그가 자란 고국에 대한 향수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노년기에 들어선 샌디김과 그 가족의 평강을 기원하며 재회할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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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1 : 중학교 동기인 김정현군이 미국 LA폭동 때 샌디김이 국내 방송사와 인터뷰한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고 며칠 전에 나에게 이야기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김정현 군이 양구 아리랑을 작사작곡한 것에 대해 통화를 하다가 샌디김의 이야기가 나왔고 정현이가 샌디김에 대한 이야기를 카페에 올리면 어떠냐고 해서 샌디김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을 두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써보았다.

 

덧붙임2 : 샌디김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였는 데 그가 1992년 LA 흑인 폭동때 동료들을 데리고 한인타운을 보호하러 왔었다는 차질진 법사의 기사와 2006년 중앙일보 기자가 미국에서 인터뷰한 기사가 있어 링크시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248856

차길진 법사가 LA 흑인 폭동때 샌디김을 만난 기사. 샌디김은 흑인 동료들을 데리고 한인 타운을 보호하러 왔었다고 한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179658

2006년 7월 7일 중앙일보 뉴스

“글로벌 코리안 - 김복천은 슬펐지만 샌디는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