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머니는 무척 부지런한 분이었다.
돼지를 기르시다가 그만두신 후부터는 이곳저곳 빈터를 일구어 채소를 가꾸시는 것이 낙이었다.
아내는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어머니의 일을 도와 드렸다.
1990년 아파트로 이사를 온 후에도 어머니는 먼저 살던 마을의 공터에 일군 밭을 계속 가꾸셨다.
부지런한 어머니는 아파트 부근의 공터도 밭으로 일구어 가꾸셨다.
1994년 어머니가 갑자기 소천하신 후 어머니가 가꾸시던 밭은 아내의 몫이 되었다.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마무리를 하면 밭일을 그만둘 줄 알았던 아내는다음해에도 밭일을 계속하였다.
양구에 가서 근무를 하던 시절이라 주말에 집에 오면 밭일을 도와 달라고 하는 데 아주 짜증이 났다.
그러다가 1999년 다시 집이 있는 춘천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아내는 우리 아파트에 인접한 부도가 난 삼익 3차 아파트 부지를 주민들이 밭을 일구어 농작물을 가꾼다고 밭을 일구자고 하였다.
마침 먼저 살던 동리에 공터도 개발로 모두 집이 들어섰기 때문에 아파트 부지의 공터를 일구게 되었다.
가물 때는 땅이 딱딱하여 삽도 잘 들어가지 않는 곳을 곡괭이, 괭이, 삽 등을 이용하여 하루에 한평 두평씩 일군 땅이 100평이 넘게 되었다.
이곳에 콩, 옥수수, 부추, 파, 들깨 등을 심어서 가꾸었고 가을에는 배추와 무를 심어 자급을 하였다.
나도 아내를 따라 다니며 타의에 의해 농작물을 가꾸는 일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
2000년 아파트 부지가 개발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여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밭을 일구며 여러가지 농작물을 심었다.
늦은 봄 어느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아파트 부지를 정지 작업을 하니 농작물을 모두 옮기라는 지시였다.
감자를 심어 막 싹이 나기 시작하였는 데 내가 출근한 동안 아내는 감자를 캐내어 아파트 지하실로 옮겼다.
크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채소는 그런대로 거두었지만 나머지 농작물은 우리의 땀과 정성도 아랑곳 없이 모두 중장비의 굉음 속에 사라져 갔다.
정지 작업을 한 땅을 바라보니 2년간 힘들여 일군 밭에 대한 애착이 가면서 마음이 아팠다.
며칠이 지났다.
일요일 오후 아내가 나를 불렀다.
건물 신축이 금년에 없기 때문에 주민들이 다시 밭을 일군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난 번 힘들여 일군 밭이 사라져간 경험이 있어 아내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아내는 혼자 나가서 금을 그어 영역을 표시하고 밭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지하실에 있던 감자를 다시 심었다.
그러나 감자가 제대로 자랄 리가 없었다.
감자를 캐는 날 땅을 파보니 새알만한 감자가 한 포기에 몇개씩 달리지를 않았다.
결국 캐낸 감자 모두가 심은 종자의 무게와 맞먹을 정도였다.
감자를 캐낸 밭은 가을에 배추를 심기로 하고 여름동안 방치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감자 포기 사이로 몇그루의 참외가 자라던 것을 그대로 두었다.
우리가 심은 참외는 아니었다. 참외를 먹고 버린 씨가 싹이 난 것이었으리라.
이 개똥참외는 여름동안 가꾸지 않았는 데도 잘 자랐다.
어느 날 밭을 바라보니 참외가 몇개 달렸다.
이 참외는 노랗게 익어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노랗게 익은 참외가 손짓을 하였고 나는 참외를 따갔다.
맛이 기가 막히게 달고 좋왔다. 아내와 아이들과 참외를 맛있게 먹었다.
그 뒤 한두번 더 참외를 따다 먹었다.
모두 20개 가까운 참외를 수확하였다.
값으로 따지니 감자의 종자값은 되었다.
힘들여 일군 밭이 사라지고, 캐냈다가 다시 심은 감자도 거의 수확을 못한 것을 우리가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고 저절로 나서 자란 개똥참외가 우리의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여 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보살펴 주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2003.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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