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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산으로 가자. 바다로 가자.

 

1963년부터 1969년까지 6년간 강원도 도지사로 장기간 재임했던 박경원 지사라는 분이 있었다.

그분이 내세운 구호가 "산으로 가자. 바다로 가자"였다.

산에 나무를 심고 산지를 개발하여 경제성을 높이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어패류를 양식하여 소득을 높이자는 뜻에서 위와 같은 구호를 제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퇴임후 며칠간은 진공상태와 같이 의식이 비어있는 것 같았으나 이내 새로운 생활에 적응이 되었다.

세가지 정도를 배우러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인터넷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농사일이 시작된 후에는 정신이 없이 바쁜 생활이 계속되었다.

아들이 3월부터 부산에서 근무하게 되어 아들 가족은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며느리가 편도선 수술을 하게 되어 4월말에 8일간 아내는 부산에 아이들을 돌보러 가게 되었고

나도 며칠 후 부산으로 합류하게 되어 농사일이 밀리게 되었다.

부산에서 온 후에 두주간을 직장에 다닐 때보다 더 분주하게 보냈다.

밭이랑에 멀칭을 하고(잡초를 방지하기 위한 비닐 씌우기) 옥수수와 참깨 등을 파종하고 고추 모종 등을 심느라

정신이 없었다.

만나자는 사람이 많고, 나가야 할 모임이 많고, 돈버는 일은 없는 데 오라는 곳도 많고...

 

그러다가 큰 마음을 먹고 아내와 나는 바닷가로 가기로 했다.

삼척에 고등학교 동기인 인원이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어 전부터 한번 가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는 데 바쁜 관계로 미루다가 결단을 내리고(?) 삼척으로 출발했다.

삼척에 가는 목적은 고사리를 꺾는 일이었다.

수요일 오전에 밭일을 대강 마무리하고 오후 4시 30분에 강릉을 경유하여 동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우리 부부가 앉은 건너편 자리에 50대 중반의 남자가 앉아서 갔는 데 통화하는 소리를 들어 보니 변호사였다.

춘천에 변론이 있어 왔다가 동해로 돌아가는 길인 것으로 보였다.

강릉을 지나 그가 전화를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데 깜작 놀랐다.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춘천으로 유학을 와 이종사촌 동생과 친하여 내가 잘 아는 후배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법대로 진학을 했는 데 내가 결혼을 할 때 왔었고, 신혼여행을 위한 버스표를 구하기 위해 종로에서 마장동 터미널까지 갔다 온 일이 있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는 후배였다.

이름의 끝자를 잘 듣지 못했고, 판사로 재직하다가 퇴임한 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기에 평일에 동해로 가는 버스를 탈 까닭이 없다는 선입견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물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나중에 이종사촌 동생에게 확인을 하여보니 후배가 맞다고 했다.

만난지 오래 되어 모습이 변하여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원인이 되었지만

아내의 말로는 상대방도 나를 유심히 보았다고 한다.

아마 후배도 내가 아직 재직 중이며 평일에 동해 삼척 방향으로 갈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연히 오랫만에 절친했던 선후배 간의 만남은 서로를 알지 못해 아쉽게 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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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 도착을 하니 친구 부부가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넷이서 저녁 식사를 하고 친구의 임지로 갔다.

집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친구는 출근을 하고 아내와 친구 부인과 나 이렇게 셋이서 산으로 갔다.

산기슭이 바닷가까지 이어지고 있어 산을 깎아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몇발자국을 가면 바로 산이었다.

셋이서 산을 오르내리며 고사리를 꺾었다.

고사리를 꺾는 것은 다른 나물을 채취하는 것과 달라 깊은 땅속 뿌리를 캘 수가 없고 잎줄기만 채취하는 것이며 곧 채취한 입줄기 옆에서 다시 잎이 나옴으로 고사리는 다시 번식할 수 있다.

(고사리의 줄기는 땅속으로 뻗어 있으며 어릴 때는 우리가 식용으로 하고 자라면 줄기와 잎으로 보이는 곳은 사실은 잎에 해당됨. 뿌리는 땅속 줄기에 붙어 있음)

 

우리보다 앞서 다녀간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였지만 우리가 처음인 곳에서는 많은 고사리를 꺾을 수가 있었다.

친구의 부인은 그곳에 몇년간 살면서 고사리 등 산나물을 채취하였기 때문에 고사리를 잘 찾았다.

오전 몇시간을 산 속을 헤매며 고사리를 꺾어 집으로 와서 보니 아내와 나 둘이서 채취한 고사리의 양보다 친구부인 혼자서 채취한 양이 더 많았다.

마당에 있는 아궁이에 걸려 있는 솥에 고사리를 삶아서 널어 놓고 점심 식사를 하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작업을 나갔다.

고사리가 많은 곳이라고 해서 갔는 데 누가 먼저 다녀갔다.

고사리를 꺾은 모양을 보니 고사리 꺾기의 대단한 고수가 지나갔다.

보통의 경우 아무리 꼼꼼하게 고사리를 꺾는다고 해도 다음 사람이 꺾을 것이 조금은 남아있는 데 이분이 지나간 곳에서는 이삭줍기를 할 것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오후 작업은 별 재미를 못보고 산을 오르내리느라 힘만 들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포구에 나가기로 했다.

장호항이었는 데 청어를 잡은 배가 들어 오고 있었다.

고등어만 한 청어가 한상자(60마리 정도)에 1만 5천원이었다.

두집에서 청어 두상자를 사고, 가자미와 청어의 회를 떠서 집으로 왔다.

2만원어치를 떠서 왔는 데 넷이서 먹을 수 없을만큼 양이 많았다.

친구 부인이 미역을 붙이는 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미역과 청어구이와 회 등 진수성찬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친구가 출근을 한 후 다시 셋이서 산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아주 줄기가 굵은 고사리를 꺾을 수가 있었다.

비가 내라다 그치기를 반복하여 비를 맞으며 고사리를 꺾었다.

몇시간 산을 오르내렸더니 힘이 들었다. 점심때가 되어 하산하였다.

늦은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 데 친구가 퇴근을 해 왔다.

 

넷이서 바다 골뱅이를 잡으러 나갔다.

동해바다 물은 아주 맑았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니 발이 시릴 정도로 물이 차가왔다.

친구 부인의 말로는 예년에는 이정도로 바닷물이 차지를 않았다고 한다.

아마 한류의 세력이 강한 모양이다. 그래서 청어가 많이 잡힌 것으로 생각되었다.

바다 골뱅이는 구르는 재주가 있어 인기척만 나면 돌에 붙어 있다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잡기가 어려웠다.

돌을 들추며 잡아야 했다.

올해는 미역이 풍년이라고 했다. 바위에는 미역이 붙어 있었고, 바닷물에 떠다니는 미역도 많았다.

바위에 붙어 있는 미역도 채취를 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바다 골뱅이를 잡다가 집으로 오는 데 친구가 큰 횡재를(?) 했다.

1.5kg 정도 되는 문어를 한마리 잡은 것이다.

4년간 근무하면서도 문어를 잡아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문어가 우리를 위해 잡혀준 것 같다고 말하며 즐거운 표정이었다.

바다 골뱅이에 미역과 문어까지 수확이 풍성했다.

저녁식사는 문어회까지 곁들인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산으로 바다로 헤맸더니 저녁을 먹자마자 눈꺼풀이 내려 덮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9시 뉴스를 조금 보다가 들어 와서 잠에 곯아 떨어졌다.

 

일찍 잠을 잔 관계로 아침 새벽 일찍 일어났다.

차를 타고 해신당 공원에 가서 해신당 공원을 거닐었다.

나무로 男根모양을 깎아서 조각을 한 작품들이 많았다.

약혼자 사이인 덕배와 아랑이 있었는 데 아랑이 갯바위에 일을 하러 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갔다고 한다.

이런 비극이 있고 나서 고기가 잡히지를 않았는 데 화가 난 어부가 바다를 향해 오줌을 누웠더니 만선이 되었다고 한다.

아랑을 섬기는 해신당이 있었는 데 해마다 남근을 깎아서 바치며 풍어를 기원했다고 한다.

이 전설을 근거고 남근 조각의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관광상품화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와서 삼척시가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한다.

 

아침식사를 하고 울안에 있는 머위와 돌미나리, 쑥 등을 채취하여 다듬어서 삶았다.

점심식사를 하고 친구 부부와 같이 3박 4일간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녔던 생산적 휴식 을 지내고 춘천으로 향하였다.

몸은 조금 고되었지만 고사리와 돌미나리, 머위, 쑥 등과 값싸게 산 청어와 바다에서 직접 잡은 바다 골뱅이

미역 등 풍성한 수확물을 가지고 오니 마음이 뿌듯하였다.

 

친구집의 컴퓨터가 인터넷 접속에 이상이 생겼고 강릉에서 기술자가 와서 고쳐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를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3박 4일동안 오랫만에 컴퓨터에서 완전히 해방된 시간을 보냈다.

사는 동안 이런 휴식도 가끔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11.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