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21일부터 24일 사이에 금강산을 다녀왔다.
어려서부터 금강산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금강산 찾아가자 1만 2천봉...."이라는 노래를 통해서 금강산은 우리세대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해 갈 수 없는 땅이었는 데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의해서 금강산 관광의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는 육로 관광이 시작되기 전이라 속초 동명항에서 출발하여 바닷길을 통해 북한의 고성항에 도착하는 해로를 이용한
관광이었다.
육로로 가면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속초 동명항에서 출발하여 공해상으로 나갔다가 북한 고성항으로 들어가는
⊃자형의 항해를 하였다.
2002년 겨울 방학 전에 학교에 공문이 왔다. 금강산 관광을 하는 데 교사와 학생은 요금 할인을 해준다고 하였다.
교사와 대학생은 60%, 고등학생은 70% 할인을 해준다고 했다.
마침 애들이 모두 학생이었다. 아들과 큰딸과 둘째딸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막내딸은 고등학생이었다.
아내도 방송통신대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여섯식구 모두가 비용을 할인받을 수 있었다.
생활 형편 때문에 가족들이 여행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큰 마음을 먹고 여행을 신청하였다.
또 한가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만약 이회창후보가 당선되면 금강산 관광이 중단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김대중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 금강산을 갔다 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겨울방학 중 금강산 관광을 결정하게 되었다.
1월 21일부터 24일까지 3박 4일간 주마간산 격이지만 금강산의 한 모퉁이나마 보고 올 수 있었다.=========================================================================================
1월 20일(월)<출발 전날>
비디오 카메라 때문에 결국 AS를 받으러 삼성전자에 갔다.
거기서 수리를 하였는 데 충전기 이상이라고 한다. 수리를 의뢰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서는 준비를 부산하게 하고. 3시 40분이 되어서야 출발을 하였다.
아들이 과외를 다녀 오느라 좀 늦었다. 아내는 무척 바빴다. 집안 정리를 하느라 그랬다.
아들이 운전을 하여 한계령을 넘어 갔는 데 양양에는 6시 30분이 되어서 도착하였다.
초등학교 동기가 운영하는 부소치 막국수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장리 쪽을 향하였는 데 전화를 하여 보니 영업을 안한다고 하여 다시 양양으로 돌아 나왔다.
날씨도 어둡고 길도 나빠서였다.
양양읍에서 꾹저구 탕으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 갔다. 이곳에서 TV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였다.
1928년에 할아버지가 금강산 일대를 관광을 하셨고, 아버지가 일제말기에 내금강 쪽을 다녀오신 적이 있다고 했다.
분단으로 인해 갈 수 없는 금단의 땅었던 곳을 내일이면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1월 21일(화)
해돋이를 보려고 일찍 일어났다. 몇번이나 밖에를 나가 보았으나 먼동이 트지를 않는다.
그런데 해가 뜨는 방향을 숲 때문에 잘못 가늠하여 해돋이를 보지 못하였다.
8시 30분쯤 부소치로 출발을 하였다. 하조대 방향으로 가는 길을 찾느라 시간이 걸렸다.
어성전으로 하여 돌아가는 길을 택하게 되었고 태풍 루사로 길이 많이 망가져서 시간이 더 걸렸다.
두부모 처럼 끊어져 나간 콩크리트 다리에서 태풍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고 인간이 자연 앞에서 무력한 것을 알 수 있었다.
9시 30분에 장리에 도착하였다. 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최장로님을 잠깐 뵙고 동기인 대하를 만났다.
59세의 초로의 사람이 되었다. 머리는 벗어졌고. 초등학교 동기이지만 나보다 5살이 많아 형이라고 하였다.
같이 양양읍까지 나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20분의 시간이지만 5남매를 대학까지 보낸 이야기를 들었다. 양양에서 헤어졌다. 45년만의 만남이었다.
10시쯤 수련원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고 속초 동명항으로 갔다. 10시 30분에 출발하였는 데 11시 30분에 겨우 도착하였다.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파도가 심한 것 같았으나 승무원은 바다가 잔잔하다고 하였다.
16시 30분쯤 해안선이 보이기 시작하였는 데 북한의 해안선이라고 한다.
배가 공해에 나갔다가 다시 북한 영해로 들어갔다고 한다. 해금강 앞바다를 지나고 있다고 한다.
멀리 북한의 해금강이 보였다. 북한땅을 바라보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14시 30분 무렵부터 방북 교육이 있었다.
반입할 수 있는 짐과 반입하여서는 안되는 짐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북한의 안내원과 접하는 요령,
사진 촬영에 대한 방법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18시쯤 장전항에 입항하였다. 북한의 해안선은 산이 해안선까지 뻗어 나왔고 시가지는 보이지 않았다.
더러 불이 희미하게 켜져 있는 것 같은 집들이 있었다.
장전항만 불이 켜져 있었다. 배에서 하선을 시작하였다. 이곳이 해방후 60년 가까이 금단의 땅이 된 북한 땅이다.
북한 땅에 첫발을 딛는 순간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는 데 의외로 마음이 담담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열을 지어 검색대를 통과하였다.
북의 군복을 입은 세관원을 보니 북한 땅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검색대에서 방북증의 사진과 얼굴을 대조하는 남자의 얼굴은 무척 날카로와 보였다. 그 기관원은 눈매가 매서웠다.
장전항은 지도에서 많이 보았던 지명이다. 이곳에서 보이는 마을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컴컴하였다.
보이는 집들은 정선 고한의 탄광 사택과 같았다. 장전항에 현대에서 지은 건물이 불이 켜져 있었고 사방이 캄캄하였다.
검색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온정각까지 이동하는 데도 사방이 캄캄하였다.
생각 같아선 상륙하자마자 땅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땅에 입을 맞출 것 같았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검색대를 통과하여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벅찬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금강산을 관광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였는가?
온천장에 왔다. 몇 사람은 온천욕을 하였는 데 우리는 북한 작가들이 제작한 예술품을 감상하였다.
1급작가, 공훈, 인민 예술가들이 그린 작품이었다. 특히 수예품이 매우 정교하고 뛰어나 보였다.
호랑이의 그림에서 남북한의 동질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식당까지 걸어서 이동하였다.
오다가 인민군 1개 분대가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발을 맞추어 걷는 거위 걸음으로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걸음걸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팔을 양 옆으로 흔들며 행진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모듬 음식(뷔페)로 저녁을 먹고 매장에서 눈요기를 하고 숙소에 도착하여 예배를 드렸다.
이사야서 49장을 읽었다. 북녘땅에서 첫 가정예배다. 남북의 평화 정착과 내왕과 교류, 통일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간 북한에서 신앙을 지키느라 고난과 핍박을 받고 순교한 신앙의 선인들을 생각하였다. 다시는 전쟁과 동족상잔과
갈등이 없기를 기도하였다.
또 북한에도 신앙의 자유가 회복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양양 남대천 일대도 태풍 루사로 큰 피해를 입었는 데 금강산 일대도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였다.
무어라 글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데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외삼촌과 외할머니,어머니가 생각났다. 이산가족의 아픔이다.
외할머니는 아들을 어머니는 동생을 생각하시다 만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주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1월 22일(수)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5시쯤 일어나 이사야서를 읽었다. 그리고 아침 기도를 하였다.
오늘 만물상 관광을 무사히 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아침을 먹고 아이젠을 빌려서 착용을 하고 만물상으로 출발하였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든 데 눈이 많이 와서 차가 언덕을 잘 오르지 못하였다.
홍송이 길 양옆에 쭉쭉 뻗어 있었다. 나무가 아름답게 자랐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데 주변의 산이 너무 아름다웠다.
말바위는 꼭 말처럼 생겼다. 차량으로 갈 수 있는 목적지까지 눈 때문에 못가고 중간 목적지에서 내려 걸어 갔다.
아이젠을 착용하였는 데도 미끄러웠다. 오르막길로 2시간 반정도를 올랐다. 경치가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기기묘묘한 바위의 모양, 나무, 눈덮힌 산의 모습, 폭포가 내려 오다가 얼어붙은 모양 등이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산 입구에서는 정강이까지 차던 눈이 올라갈수록 점점 깊이 쌓여서 중간 목적지 부근에서는 허리까지 찼다.
금강산 일대에 20년만에 큰 눈이라고 하였다. 덕분에 금강산의 아름다운 설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通高之雪(통고지설 양강지풍 - 통천과 고성의 눈, 양양과 강릉의 바람)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온정리는 할아버지가 다녀 가신 곳이다. 할아버지가 엮으신 천자문 책인 千人筆之에 온정리 분들의 이름이 많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온정리에서 만물상으로 오르셨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감탄하셨을 그 광경을 오늘 손자인 나와 손자며느리인 아내와 증손들인 아이들이 보고 있는 것이다.
폭설로 끝까지 가지 못한 것이 유감이지만 중간 정상에서 바라 본 관음연봉을 따라 펼쳐진 금강산 만물상의
광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에를 온 것이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였다.
구스타포 스웨덴 황태자가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실 때 맨 마지막으로 금강산을 만드셨을 것이라는 말이 너무 실감이 되었다.
내려 오는 길에 북한 안내원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대학생인 아들은 29세된 북한 안내원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려 왔다.
대학생들의 학교 생활과 아르바이트, 의대 학제, 남북한 대학에서 인기학과 등 비정치적인 이야기만을 나누었다.
뒤로 내려 오며 우리측 가이드들과 북한 측 환경지도원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을 보았다.
우리 측 남자 가이드가 북한 측 여자 지도원을 붙잡아 눈에 집어 던지고 장난을 한다.
깔깔대고 웃고 떠들며 농담을 주고 받는 모습이 평범한 20대의 젊은이일 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남북이 통일되면 이질화된 생활방식 때문에 그 갈등이 적어도 한 세대는 갈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히드득대며 농담을 하고 장난을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통일이 되어도 갈등은 30대 이상의 기성세대의 몫이고
20대 이하는 곧 융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2시가 넘어서 온정각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삼일포로 출발하였다.
삼일포로 가는 길에 차창밖으로 북한 주민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민들이 생활하는 집들은 80년대 탄광 사택과 같았다.
회색빛 나는 우중충한 주택들, 겨우 우리의 키정도가 될까하는 낮으막한 나무나 시멘트로 된 전신주
이런 것들은 40년전 우리의 중학교 시절을 연상하게 하였다.
너무 마음이 아픈 것은 산에 나무가 없다는 것이다. 붉은산, 황폐한 산 이것은 50년대 말 내가 보았던 산의 모습이다.
눈이 덮혀 희게 보이지만 틀림없이 눈이 녹으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붉은 산일 것이다.
연료가 나무이기 때문에 산이 황폐한 것이다.
무엇인가 등에 짊어지고 걸어가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마을의 집은 길게 지은 획일화된 브로크 집으로 기와나 스레트를 이었다. 30-40년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고 왜소한 모습의 인민군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40년전으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다.
아니면 시간이 흐르다가 1960년대에서 멈추어 선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삼일포에 다가가자 왕대밭이 보였다. 북녘의 땅에서 대나무밭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대나무의 북한계다.
북한에서는 이곳밖에 대나무가 자생할 곳이 없어 아마 대나무를 개량하여 이곳에 식재하였을 것이다.
삼일포는 석호였으나 입구가 토사로 막혀서 담수호가 된 호수이다. 민물고기가 많다고 한다. 둘레는 8km나 된다고 한다.
신선이 와서 노닐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관동팔경 중의 하나라고 한다.
호수는 주변의 산세와 어울려 환상적인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낮으막한 언덕, 자연과 잘 조화된 정자각. 얼어붙은 호수. 이런 것들이 환상적인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삼일포를 둘러 보고(극히 일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인민군들이 철조망을 보수하는 작업을 보았다.
길에서 본 주민들은 자루에 무엇인가를 넣어 등에 짊어지고 있었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간간히 부모의 뒤를 따라가는 어린이의 모습도 보였다.
봉암소학교와 고등중학교도 지났는 데 학교 건물이 낙후된 것이 40년전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건물과 같았다.
북한 주민들이 어렵게 사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오는 길에 지난 마을에도 전등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간혹 희미한 백열전등 불빛이 보일 뿐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예배를 드리고 피곤하여 일찍 잤다.
1월 23일(목)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아침식사는 예정대로 했으나 출발시간이 폭설로 인해 지연되었다. 구룡연으로 간다고 하는 데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9시 반이 되어서 출발하였다. 구룡연 입구까지 차로 가야 하나 길이 막혀 걸어서 이동하였다.
신계사 터를 지났다. 6.25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장안사, 유점사 등이 절터만이 지도에 표기되어 있었다.
전쟁은 문화재와 종교 유산마저 잿더미로 만들었다.
신계사 터에는 부도가 남아 있었고 탑도 남아 있었다. 홍송이 우거졌으나 산불로 고사한 것들이 있다.
동해안의 산불은 그 피해가 북한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눈을 쳐 놓았지만 겨우 통행로만 제설작업을 하여 한줄로 걸어 갔다. 계속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꽤 먼 거리로 지리한 느낌이 있었다.
금강산의 설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동하느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중간중간 비디오 촬영을 하고 사진 촬영도 하였다.
중간에 차가 서는 곳이 있었는 데 그곳에서 구룡연쪽으로 계속 걸어서 갔다. 금강문까지 간다고 한다.
오르막 길을 걸어서 가다가 삼록수라는 샘터에서 물을 마셨다.
군데군데 표지석이 있었다. 김일성 주석을 찬양하는 그런 글이 적혀 있는 비석이 있거나 바위에 구호가 새겨져 있기도 하였다.
가는 길에 삼록수라는 샘이 있었다. 김일성주석이 산삼과 녹용에서 글자를 따다가 지었다는 이름인데 말 그대로 물맛이 좋왔다.
눈이 덮힌 금강산의 능선들은 너무 아름다웠다. 아쉽게도 목적지까지 가지를 못하고 중간 지점에서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온천욕을 하러 갔다. 溫井里라는 이름은 온천이 있기 때문에 생긴 동리 이름인데 할아버지가
다녀 가신 곳이다. 70여년전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온천욕을 하셨을 것이다. 금강산 연봉을 바라보면서 온천을 하는 묘미는…
이곳 온천수는 너무 뜨거워서 냉각시켜서 사용한다고 한다. 지하수를 뽑아 가열하여 쓰는 대부분의 남쪽 온천수와는 달랐다.
눈이 쌓인 곳에 있는 노천탕에서 온천욕을 하였다.
온천욕을 하고 교예단 공연을 관람하였다. 교예단의 공연 능력은 神技에 가까웠다.
공중에서 그네를 타면서 몸을 날려 다른 공연자에게 매달리고 하는 것은 신기하였다.
유연한 몸동작으로 공중에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오케스트라의 환상적인 음악이 흐르고 공연자는 음악에 맞추어 마치 잘 설계된 기계처럼 몸을 유연하게 움직인다.
하나의 예술이다. 특히 술잔 몇개를 받침대 위에 놓고 입으로 받침대를 물고 하는 연기는 압권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났다.
공연도중 공연자가 큰딸에게 공을 던졌는 데 큰딸이 잘못 던져 주어 공연자가 이를 받았으나 착지가 불안정하여
공연자가 다치는 줄 알았다.
숙소에 돌아와 너무 피곤하여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잤다. 북한 땅에서 세 번째 날은 이렇게 자나갔다.
금강산에서 우리 가족들
1월 24일(금)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다시 세관 검색대를 통과하여 승선하였다.
눈덮힌 금강산을 눈에 담아 두기라도 하듯이 오랫동안 주시하였다.
오면서 보니 장전항에는 꽤 많은 집들이 있었고 10층짜리 아파트도 보였다.
그런데 입항할 때는 불빛이하나도 보이지 않았었다. 회색의 도시, 적막의 도시가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배가 장전항을 출항하여 바다로 나갔다. 나는 북한 해안선을 갑판위에서 응시하였다.
배는 북한의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장전항 부근의 헐벗은 산의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출항후 30분쯤 지나서 핸드폰을 돌려 주었다. 큰댁으로 전화를 하였다. 인천 매형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잠깐 선실로 들어 갔다가 다시 나와서 멀어지는 북한 땅을 계속 응시하였다.
군함이 한동안 따라 오는 것 같았다. 멀리 조업하는 어선들도 보였다.
멀리 금강산의 연봉이 흰눈을 뒤집어 쓴채 보였다. 삼일포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해금강으로 보이는 곳에서 선수를 동으로 돌렸다. 먼 바다로 갔다가 다시 해안이 보였다. 남쪽의 바다다. 속초항에 입항하였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 차가 다니는 모습에서 사람이 사는 것을 느꼈다. 너무 많은 것을 북에서 느꼈다.
비록 북녘 땅의 한 모퉁이를 다녀 온 것이지만 시간이 멎은 곳,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40년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왔다.
속초 동명항에 입항하여 회로 점심을 먹고 춘천으로 왔다. 5일만에 집에 도착하였다.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역사문화 탐방기(2) - 요시다 쇼인의 빛과 그림자 (0) | 2015.01.23 |
---|---|
일본 역사문화 탐방기(1) 부산항 - 일본 후꾸오까 (0) | 2015.01.21 |
청연서당의 학인들과 함께 한 강화도 여행 (0) | 2014.01.25 |
증도의 문준경 전도사님 순교 유적지와 목포, 부여, 안면도 여행기(2008년 8월) (0) | 2014.01.12 |
오랫만에 본 토종닭(연변 백두산 여행 중) (0) | 2013.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