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하기시(萩)로 이동했다.
하기시는 야마구치현의 동해 연안에 위치하며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성곽도시로 17세기 초에 건설되어 19세기 후반까지 260년간 야마구치현의 정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에도 시대의 모습이 남아있다고 한다.
여행 목적이 역사․문화탐방인지라 메이지 유신의 주역을 길러낸 사상가 요시다 쇼인의 유적을 돌아보았다.
그는 일본 야마구치현 조슈(현재 하기) 출생으로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의 존왕파(尊王派)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이론가로 여겨진다.
《유수록(幽囚錄)》이라는 저서를 통해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 등을 주창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또히로부미, 이노우에 카오루,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 등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으며 근대 국가 일본의 건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곳에는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쇼카손주크(松下村塾)가 보존되어 있고, 요시다 쇼인의 신사와 역사관이 있다.
쇼카손주크에는 건물과 강의실이 보존되어 있고, 요시다 쇼인이 가르친 제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제자들 중 유명한 자들은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이또 히로부미를 비롯해서 그의 수제자라고 하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메이지 유신의 삼걸의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우리나라와 악연이 있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이다.
역사관에는 요시다 쇼인의 가족들의 모습이 밀랍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어린 요시다 쇼인이 숙부인 마마키 분노신에게 교육받는 모습, 11세에 번주인 모리다카치카(毛利敬親다) 앞에서 병법을 강의했다는 어전강의의 모습, 페리제독의 군함을 타고 밀항하려다가 실패하여 투옥된 모습, 출옥하여 쇼카손주크(松下村塾)를 건설하는 과정, 막부의 요인들을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압송되어 취조를 받는 모습 등 쇼인의 일생이 밀납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또 이또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가쓰라다로(桂太郞), 데라우치마사타케(寺內正毅), 야마카타아리토모(山縣有朋) 등 야마구치현 출신들로 일본 재상을 지낸 7명의 밀랍 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중 가쓰라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가쓰라 태프트 조약을 맺은 인물이고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 총독을 지낸 자로 우리와은 악연이 깊은 인물들이다.
하기시 무사 마을에는 메이지 유신에 참가해서 나중에 출세 영달을 한 인물들의 생가 등이 많이 있다.
한 마을에서 한 나라를 움직인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것이다.
이들은 이웃을 잘만나 출세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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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의 주역들과 한반도 침략에 앞장선 인물들을 길러낸 쇼카손주크(松下村塾) 안내판
요시다 쇼인의 가족들 - 다른 자료에서 인용
요시다 쇼인이 11세에 다이묘 앞에서 병법을 강의했다는 어전 강의의 모습(밀랍인형으로 제작)
요시다 쇼인이 공부하는 모습 - 다른 자료에서 인용
수감되어 있는 요시다 쇼인의 모습 - 다른 자료에서 인용
요시다 쇼인의 역사관
요시다 쇼인 특별 전시회 (2014.10 ~ 2015.10) - 다른 자료에서 인용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 - 이또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 유신과 일본 근대사의 주역들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나라와 악연이 있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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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역사적으로 이름이 있는 사람의 신사가 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토쿠(安德)천황의 신사가 있고,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잡혀가서 아리타 도자기의 도조(陶祖)가 된 이삼평이나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선진 문화를 전한 왕인박사도 신사에 모셔진 인물이 되었다.
요시다 쇼인의 신사가 있다는 것은 그가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우 정치인으로 우리와 악연을 맺고 있는 아베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라고 한다.
신사의 모습은 일본 신사의 일반적인 전형을 따르고 있는 데 정전 옆에는 소원을 걸어사 매다는 에마(繪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등 다른 신사의 모습과 유사하였다.
이제 쇼인은 죽소원을 들어주는 神의 모습으로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모양이다.
요시다쇼인, 메이지유신, 이토히로부미, 안중근의사 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경내를 둘러보고 하기성터로 이동하였다.
요시다 쇼인 신사 입구 - 그는 일본인의 신이 되어 있다. - 다른 자료서 인용
신사 내부의 모습 - 다른 신사들의 양식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태동지 기념비 -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친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길렀음으로 위와 같은 명칭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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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에 대한 보충 설명 자료
“요시다 쇼인은 1830년 조슈번 하기 지역의 하급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숙부의 양자로 입적되어 숙부인 타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공부하였으며, 11살 때에는 번주(藩主)에게 어전강의(御前講義)를 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1850년에는 서양의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규슈[九州]에 유학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에도[江戸]로 가서 사쿠마쇼잔[佐久間象山]에게 학문을 배웠다. 1853년 미국의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개항을 압박하자, 스승인 사쿠마쇼잔[佐久間象山]과 함께 흑선(黒船)을 시찰하고 큰 충격을 받아 해외유학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동향의 친구인 카네코 지게노스케[金子重之輔]와 함께 나가사키[長崎]에서 러시아 군함에 밀항하여 해외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끈 함대의 압박으로 미일화친조약(Convention of Kanagawa)이 체결되자, 정박 중인 미 군함에 승선하여 밀항하려 했지만 실패하여 스승인 사쿠마쇼잔[佐久間象山]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조슈[長州 현재의 하기 야마구치현 ]로 이송된 뒤에 감옥 안에서 밀항(密航)의 동기와 사상적 배경 등을 담은 《유수록(幽囚錄)》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蝦夷]를 개척하여 제후(諸侯)를 봉건(封建)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카나와[琉球]와 조선(朝鮮)을 정벌하여 북으로는 만주(満州)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타이완[臺灣]과 필리핀 루손[呂宋]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배경이 되는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 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55년 출옥하였으나 영지(領地)에 유폐(幽閉) 처분을 받았다. 1857년 숙부가 운영하던 글방[塾]의 이름을 물려받아 영지(領地)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열었다. 여기에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뒷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주역이 되는 주요 지도자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美日修好通商条約)이 조정(朝廷)의 허락도 없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반 막부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요시다 쇼인도 막부 토벌을 위해 마나베 아키카츠[間部詮勝]을 암살하려 했으나 제자인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등이 동조하지 않아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다 막부에서 반막부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이른바 ‘안세이[安政]의 대옥(大獄)’이 시작되자 감옥에 갇혔고, 1859년 11월 21일(安政 6년 10월 27일) 에도에서 처형되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출신들은 대부분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홋카이도의 개척과 오키나와의 일본 영토화, 조선의 식민지화, 만주와 타이완, 필리핀의 영유 등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사상은 일본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일본 우익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79357&cid=40942&categoryId=3341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시다 쇼인은 일본 극우사상의 뿌리가 되는 인물로 우리와는 악연을 맺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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