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마다 낫토를 주는 것이 특징이다.
청국장의 특유한 냄새가 없고 콩 알갱이 끼리 들러붙는 점성이 강하다.
낫토가 발효하며 생긴 끈끈한 끈 같은 것이 엉겨있어 콩알이 잘 분리되지 않을 정도로 점성이 강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원폭 피해 현장인 평화공원과 원폭 자료관으로 이동했다.
9시가 되어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에 입장을 했다.
자료관에는 원폭이 폭발하는 순간의 사진과 피폭 피해지역 범위와 피폭현장의 사진, 피해자들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폭심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폭풍과 열기를 덜 받아 생존한 생존자들의 비참한 모습과 치료 장면 등이 사진 자료로 전시되어 있었다.
폭심에서 가까운 피폭현장은 성한 건물은 하나도 없고 완전히 파괴되어 잔해만 너부러져 있있었다.
또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고 폭심에서 조금 벗어난 현장에서는 화상을 입은 생존자들이 비참한 모습과 긴박한 구조 작업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전시이긴 하지만 일상의 삶을 영위하다가 피해를 당한 것이다.
시민들은 대피하라는 미군 측의 경고가 있었다고 하지만 군부가 통제하고 있고 다른 도시의 사례를 보아 재래식 폭탄을 사용한 폭격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딱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날의 시계는 8월 6일 8시 15분에서 멈추어 있었다.
폭발의 열기와 후에 들이닥친 폭풍우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사람들은 방사능의 피해에 시달려야 했다. 이것은 평생을 두고 후유증을 안겨 주었고 대를 이어 피해를 주었다.
원자탄 폭발 순간의 모습들
원폭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 시가지 - 다른 곳의 자료를 인용
원폭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 시가지(2) - 멀리 원폭 돔이 보인다. 다른 곳의 자료를 인용
폭심 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생존자들의 비참한 모습 - 다른 곳의 자료 인용
원폭 부상자들의 비참한 모습 - 다른 곳의 자료 인용
화상을 입어 물가로 모여들었다가 사망한 희생자들의 모습 - 다른 곳의 자료 인용
피해자의 유품 시계, 8시 15분에서 많은 희생자들의 꿈과 희망이 멈추어 버렸고 생존자들의 오랜 아픔이 시작되었다. - 다른 곳의 자료 인용
잔해 속에서 발견된 단란했던 가정의 모습 -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곳의 자료에서 인용
히로시마의 피해는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전시물을 프래쉬를 터뜨려 촬영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 촬영을 하지 못했다.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평화 공원 내의 시설물들을 관람하였다.
히로시마 산업 장려관 건물이었고 폭심 가까운 곳에 있어 주변 건물들은 돌위에 돌이 겹쳐지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졌으나
기적적으로 완파를 면하고 돔이 남아 있는 원폭 돔을 둘러 보았다.
70년의 세월이 흘러 구조물이 약해져서 보강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였다.
전날 밤 NHK 뉴스에서 원폭돔의 보수공사를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기성의 武士村을 방문하기 전날에는 이토오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카오루에 대한 특집 방송을 시청했는 데 방문 전날 관련 보도를 TV를 통해서 본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또 위령비와 평화의 종을 둘러 보았다. 인솔 교수님들과 일행들이 평화의 종을 차례로 울렸다. 다시는 이땅에 이런 비참한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피폭 전과 피폭 직후의 원폭 돔 - 히로시마현 산업장려관 건물인데 폭심에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건물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완파를 면하고
일부가 남은 것을 보존한 것으로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건물의 안전문제로 보강공사를 시행하고 있다.
건물의 안전 문제로 원폭돔은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 위령비, 희생자를 추모하는화환과 화분들이 진열되어 있다.
평화의 종 - 같이 간 학우들은 다시는 비참한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화의 종을 타종하였다. - 다른 곳의 자료 인용
위령탑 앞에서 단체 사진 - 뒷줄 왼편에서 6번째가 필자
원폭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 당시 원폭 피해지역인 히로시마에는 징용으로 끌려 가거나 노동을 하러 간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원폭 피해자의 1/10 정도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피폭소녀 사다코가 회복을 염원하며 접었다는 천마리의 종이학, 소녀는 천마리를 다 접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음.
다른 분의 자료에서 인용
마음이 아픈 것은 천마리의 종이학이었다. 피폭 소녀가 학을 접다가 천마리를 못채우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마음 아픈 사연이었다.
기요사와 기요시(凊澤洌)는 암흑일기에서 1945년 1월 1일 일기에서 일본이 처음으로 전쟁을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1944년 11월부터 미군 폭격기에 의한 일본 본토 폭격이 본격화되었고 그때까지의 전쟁터는 중국,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립핀 등 일본밖이었기 때문에 그는 일본이 처음으로 전쟁을 경험하고 있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일본이 '45년 초반쯤에서 전쟁을 멈추었다면 ‘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 4월의 오키나와 전투 개시, 8월의 히로시마 원폭 등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경내를 둘러 보며 노력동원이 되었던 어린 학생들이 집단 참사를 당한 사연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에서였다. 당시 히로시마에 강제 징용 등으로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 2만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하는 데 히로시마 피해자의 1/10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나라를 잃고 징용으로 강제로 끌려 가겄나 호구지책 때문에 일하러 가서 피폭을 당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반성을 모르고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동을 정당화하는 일본 극우들에 대한 증오심이 끓어 올랐다.
히로시마 평화공원과 원폭 자료관의 어디에도 원폭의 피해만을 강조했지 이를 초래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관람을 끝내고 나오다 보니 반핵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원전 건설을 반대하는 서명을 받고 있었다.
나도 서명을 했다. 그리고 원전을 재가동하고 건설을 추진하는 아베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
일본인 앞에서 역사 왜곡을 해가며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일본을 재무장시키려는 아베를 비판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히로시마 원폭의 흔적이 남아있는 평화공원 관람을 끝내고 축경원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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