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퇴직을 하고 한국 방송통신대 일본학과 2학년에 편입학하였다.
'80년대 중반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할 목적으로 학원에서 일본어를 몇달간 배우다가 응시자격 연령이 하향되어
일본어 학습을 중단한 경험이 있어 일본어가 전혀 생소한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학과를 택했다.
편입을 하여 공부를 해보니 "백수가 과로사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퇴직을 했는 데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생겨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퇴직하던 해에 예정에도 없는 기간제 교사를 3개월간 하느라 학기가 맞지 않아 휴학을 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4년 과정을 수료하게 되었다.
일본학과에서는 매학기마다 일본 역사문화탐방을 다녀 오는 데 1월 6일부터 10일까지 실시되는 역사 탐방에 신청을 하였다.
일본에 가는 방법은 배와 항공기를 이용하는 것인데 나는 배편을 이용하기로 했다.
배를 이용하는 것이 경비가 조금 적게 나가기도 했지만 옛날 사람들이 오갔던 현해탄을 건너고 싶었기 때문이다.
5일 월요일에 아내와 같이 집을 출발하여 울산에 있는 아들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부산 국제 여객터미널에서
일본에 가는 여객선 카멜라호에 승선하였다.
6시 30분쯤 승선수속을 마치고 7시부터 배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카멜라호는 10시 30분에 부산항을 출발하였다.
카멜라호의 창밖으로 보이는 부산의 불빛을 멀리하며 배는 일본으로 향했다.
2004년 1월말 중국에 갈 때도 배를 이용했는 데 두번째로 배편을 이용해서 출국하게 되었다.
잠이 오지를 않아 갑판위에 올라가 보았다.
날이 흐린 편이라 별들은 별로 보이지를 않았다. 음력 열엿새라 달빛이 밝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물결을 가르며 배가 앞으로 가고 있었는 데 좀 멀리 보이는 바다는 강물처럼 흐르는 것으로 보였다.
바다의 색이 검게 보이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여울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탄(灘)자를 붙여 현해탄(玄海灘)이라고 했던 것 같다.
갑판 위에서 고대에 이 바닷길을 통해 일본에 오갔을 가야와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바다를 건넜을까?
다음으로 일제때 일본에 가서 벌어먹기 위해 이 바다를 건넌 민초들과 공부를 하거나 수학여행을 가느라 바다를 건넌 학생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바다를 건넜을까?
직업상 일본으로 간 분들은 일본에서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 생각을, 유학생들은 금의환향의 꿈을,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며 이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2차대전 말기 징병이나 징용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어 이 바다를 건넌 분들은 피압박 식민지 백성으로 나라를 잃은 슬픔을 한탄하며 이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또, 이땅을 침범했다가 약탈품을 챙겨 이 바다를 건너간 왜구들과 임진왜란때 패전해서 이 바다를 건넌 왜군들을 어떤 생각을 하며 이 바다를 건넜을까를 상상하여 보았다.
새벽 두시가 넘어서 겨우 잠이 들었다.
잠을 깨보니 아침 6시였다. 후쿠오까 항에 배가 정박하였다. 시내의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보였다.
아침 식사를 하고 7시에 하선하였다.
통관수속을 하고 밖으로 나가니 우리가 타고 갈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배를 이용해서 간 일행은 20명이었다. 비행기편으로 오는 일행들과 점심때 합류하기로 했는 데 이번 역사문화 탐방에 참여하는 인원은
인솔자를 포함하여 모두 77명이라고 한다.
배편으로 온 분들은 제주도에서 온 학우 4명과 우리 부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부산, 울산, 창원, 대구 등 영남지방에 거주하는 분들이었다.
버스를 타고 후쿠오까 성으로 이동하였다. 후쿠오까는 예전에는 하카다(博多)라고 불리웠는 데 고대의 항로는 하카다 항을 일제때는 시모노세키항을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후쿠오까 성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구로다 요시타카가 1601년부터 7년간 축성한 것이라고 한다.
성내면적은 약 41만 평방미터(13만평 정도)인 데 대부분의 성벽은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성의 기초부분은 엄청나게 큰 돌로 쌓았다. 크고 육중한 돌들로 성을 쌓은 모습이 우리나라의 城과는 비교가 되었다.
이 성은 다른 일본식 성과 달리 천수각(天守閣)이라는 누각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대신 가장 높은 곳에 천수대가 있다고 한다.
성안에는 매실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후쿠오까의 위도가 제주도와 비슷해서 그런지 동백나무 등 상록수가 많이 눈에 띄는 등
제주도 기후와 비슷한 것 같았다.
성내를 관람하고 성밖으로 나왔다.
다음 코스는 오호리(大濠) 공원이다. 공원 안에 있는 호수는 성의 해자의 일부였다고 한다.
물은 아주 맑고 깨끗하였으며 주위에 산책로가 나있었다.
산책로에는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산책로를 따라 아침 운동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호수를 한바퀴 돌아 도로쪽으로 이동하는 데 큰 동상이 하나 보였다.
누구의 동상인가 가보니 동상의 주인공은 히로다고키(廣田弘毅)라는 인물이었다.
비문을 읽어 보았다. 1876년에 태어나 一高와 동경제대(東京帝大)를 나온 수재로 젊은 시절 유도를 했으며 극우단체였으며 우리나라와 중국을 침략하는 데 첨병 역할을 하였던 현양사(玄洋社) 회원이었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는 현양사의 지원으로 공부를 했다고 나와있다. 그는 외교관으로 소련 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외무대신과 수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나름 군부의 득세를 견제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力不足이었고 난징 대학살 당시 외무대신이었기 때문에 민간인으로는 유일하게 A급 전범으로 사형을 받았다. 비문에는 그의 공로를 긍정적으로 기술하였고 그가 억울하게 교수형을 받았다고 써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하마디도 구명을 위한 변명을 하지 않고 의연하게 형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히로다에게 先生이라는 존칭을 써가며 그의 위업을 기리는(?) 비문으로 전범인 그를 찬양하고 있었다.
같이 간 일행 중 한분이 ‘현양사’라는 표현을 보고 “나쁜놈”이라고 말해서 일행들이 크게 웃었다.
주위를 살펴 보니 후쿠오까 호국신사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비행기로 오는 일행과 합류하려면 시간 여유가 있어 인근에 있는 후쿠오까 호국신사에 들어가 보았다.
신사 입구에는 큰 나무로 만든 도리이가 있었고 안에 이를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본전이 있는 전형적인 신사구조를 하고 있었다.
본전 앞에는 기원을 하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본전 안으로 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경내를 둘러보던 나는 한 동상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가미가제 특공대원의 동상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비석이 서있었고 그 옆에는 큰 벚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나무 옆에는 일본 해군 비행과 예비 학생 생도 동기생들이 심었다는 표석이 서있었다.
비문을 읽어 본 나는 갑자기 몸이 경직되는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비문의 내용는 대략 아래와 같았다. 군국주의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된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을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애국자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고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모습을 현장에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이 소화 16년부터 소화 20년에 걸쳐서(2차대전을 의미함) 일본의 독립과 존속을 지키고 구미열강으로부터 식민지화되어 있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영국, 미국, 중국,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와 전쟁하여 서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불리하여져서 오끼나와에 적이 상륙하는 사태에이르게 되어 이 적의 압도적 전력을 저지하기 위해 드디어 비행기와 배에 올라 적함에 몸을 부딪히는 장열한 공격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장열하게 산화한 20세 전후의 젊은 영령들의 숭고하고 용감한 모습을 후세에 길이길이 전하려고 특공전몰자 위령 현창회의 협력을 얻어 여기에 동상을 세운다. 전후의 교육과 모략에 의해 평화와 개인주의에 치우친 것이 현대인이다. 후꾸오까 출신 301명의 영령의 이름을 새긴 이 상을 보고 만지며 자신의 생명을 바쳐 지킨 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기 바란다.”
平成 24년( ) 12월 8일(대동아 전쟁 개전 기념일) 특공용사의 상 건립 福岡(후꾸오까)현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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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 일본의 침략전쟁에 앞장 섰던 자들이 애국지사로 칭송을 받는 현장을 보고 나니 마음이 착잡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일본이 결코 과거를 반성하지도 않고 있으며 오히려 침략전쟁을 국운이 뻗어 나갔던 시대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되어 항공기로 도착하는 일행과 합류하러 가려 했으나 제주도에서 온 老學友 한분이 다른 사람들을 일행으로 착각하고 쫓아 갔다가 낙오가 되어 그분을 찾느라 작은 소동을 벌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어 함께 시간 안에 서울에서 오는 일행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온 일행들과 합류하여 버스 두대에 분승하여 간몬대교를 건너 시모노세키로 향하였다.
배에서 바라본 부산의 야경
견고한 후쿠오까 성의 성벽
오호리(大濠) 공원의 호수, 호수 물이 아주 맑고 깨끗하였으며 산책로에는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A급 전범으로 사형을 받은 히로다고키(廣田弘毅)의 동상, 현양사 단원이었던 그의 비문은 그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내용이다.
다른 곳에서 가져 온 사진임
후쿠오까 호국신사 본전 앞 - 신사에서 기원을 하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가미가제 특공대원의 상과 그들을 찬양하는 비문이 새겨진 비석
해군 비행과 예비 학생 생도 동기생들이 심은 사쿠라(벚) 나무, 심은 지가 오래었는지 거목으로 자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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