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교 동기들 약 70%가 춘천중 출신들이다.
나머지 30% 중 대부분은 양구, 인제, 화천, 홍천, 가평 등 인근 지역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춘천에 유학온 이른바 촌넘들이다.
그밖에 원주, 강릉, 철원 등 강원도 전역에서 동서의 영재들이 모여들었다.
춘천에서 근무하는 형이나 누나를 따라서 타시도에서 춘천에 와서 공부한 친구들도 상당수 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누나나 형, 삼촌이나 외가가 있으면 좁은 방에서 조카나 사촌들과 부대끼며 공부를 했다.
나도 우리집이 춘천에 이사오기까지 두달 가까이 작은 고모댁에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양구에는 고등학교로는 양구농업고등학교 하나만 있었다.
농고라 실습지가 많았는 데 지금과 달리 인력으로 농사를 짓다보니 농고에 다니는 선배들은 매일같이 논밭에서 일을 했다.
고등학교 전교생이라야 100명도 안되었고, 여학생들을 빼면 60-70명밖에 안되니 매일같이 실습이라는 명목의 노동을 했다.
고등학생들만으로는 일손에 모자라 모내기, 퇴비베기, 벼베기 등과 실습지 경작에 중학생들도 자주 동원되었다.
모내기때는 이틀간 수업을 전폐하고 모내기 작업에 동원되었다.
1,2학년들은 주로 모를 심을 곳에 모를 운반해다 주는 못종 노릇을 했다.
밭에서 실습을 하는 것은 주로 삽으로 땅을 파 밭을 일구는 것이었다.
밭에다가 애들을 몰아넣고 일을 하라고 하면 농땡이를 치니 농업 선생님은 개인별로 구간을 정해주고 작업을 마치면 놀으라고 하였다. 일종의 도급을 준 것인데 이렇게 하면 애들은 한시간이 걸려도 끝나지 않던 일을 순식간에 마치고 노닥대며 놀았다.
여름방학 직전에 퇴비 베기를 했는 데 고역이었다.
풀을 베어다가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데 두세명이 어울려 돈을 주고 리야카를 빌려 풀을 운반해서 할당량을 채웠다.
그밖에 사료용 건초 채취하기, 벼베기와 타작 등에 동원되었다.
일을 하기 싫은 나이기도 하였지만 어린 마음에도 농고로 진학하기는 싫었다.
그런데 나에게 춘천으로 나가고 싶다는 열망을 불어 넣은 분이 있었다.
나보다 3년 위인 먼 친척 아재벌이 되는 분이었다.
아재는 나에게 춘천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선동을 하였다.
춘고에 가지 않으면 대학에 가지 못한다고 하며 어떻게 해서든 고등학교는 춘천으로 가라고 했다.
우리가 중3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남학생들은 너도 나도 춘고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부모님께 고등학교는 춘천으로 가겠다고 바짝 우겼다.
가뜩이나 학생 확보에 비상이 걸려 있던 고등학교에서는 학생 설득에 나섰다.
선생님들이 농고로 진학하라고 권유하였다.
선생님들의 설득도 있었지만 가정 형편상 춘고를 희망했던 많은 녀석들이 양구농고 진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최종적으로 춘고에 진학한 중학교 동기들은 나와 초등학교때부터 동기인 김도영, 올해 정년퇴임을 한 박제호, 김종성과 나와 이웃에 살던 최무성, 권석봉, 2학년까지 같이 다녔으나 졸업은 하지 못한 박*균 등은 양구에서도 읍이 아닌 촌에 사는 친구들이었다.
주영실, 신명철, 작고한 임현간 등은 읍내에 거주하거나 가까운 지역에 살던 친구들이었다.
합격후 등록을 하지 않은 두명을 포함해 양구 중학교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인 11명이 청운의 뜻을 품고 대 춘고로 진학을 하였다.
입학시험을 보아야 했지만 6.25동이인 우리는 또래들이 전쟁에 많이 희생되는 바람에 별다른 경쟁이 없이 거의 합격을 하였다.
양구에서 간 11명도 모두 합격하였다. 이런 기록은 양구중 역사상 전무후무하였을 것이다.
==========================================================================================
지금 생각하면 춘천으로 진학을 한 것은 내 일생에서 가장 큰 결단이고 모험이었다.
나중에 우리 집 전체가 이사를 왔지만 입학할 당시에는 부모님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은 어린 나에게는 모험이었다.
입학 시험을 치러 춘천에 오는 버스에서 같은 목적으로 춘천에 오는 이영만이를 만났다.
공교롭게도 영만이의 수험번호는 나보다 하나가 빨랐던 것 같다.
영만이가 양구에서 같이 나간 친구말고는 처음 사귄 친구다.
입학후 1학년 2반에 배정되었다.
이때 우리반 반장은 김용환이었다.
춘천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후 3년간 학교와 집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는 생활이 반복되었고 때가 되어 졸업을 하였다.
서울로 더 넓은 곳으로 진출하려던 고교시절의 꿈은 대학입시 낙방으로 일장춘몽이 되었고, 나의 생활근거지는 자연스럽게 춘천이 되어 춘천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졸업을 하고 40년이 넘는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이제는 퇴직을 하고 노후생활의 초입에 들어서게 되었다.
고교에 입학할 때 가졌던 청운의 꿈은 그야말로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열심히 무언가를 그린다고 하기는 했는 데 그려 놓은 그림은 처음 구상과는 다르게 나왔다.
호랑이를 그렸지만 고양이 그림이 나온 것 같다.
짧은 인생에 많은 시행착오와 성공과 실패가 있었지만 춘천으로 고교진학을 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2012. 9. 25
'지나간 고교 시절 돌이켜 생각하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나간 고교시절 돌이켜 생각하니 - 소설 분지(糞地) 사건 (0) | 2013.09.14 |
---|---|
신문 사설 공부(1966.9.6 - 9.10) 주한미군 감축론외 (0) | 2013.09.10 |
월남전 참전용사 환송 (0) | 2013.08.29 |
지나간 고교시절 돌이켜 생각하니(2) - 자습시간, 과학반 폭발사고 (0) | 2013.08.24 |
지나간 고교시절 돌이켜 생각하면(1) (0) | 2013.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