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우리가 청운의 큰 뜻을 품고(떠밀려서) 고등학교에 입학한지도 42년이나 되었고, 졸업한지도 39년이나 되어 모교인 춘천고등학교와 인연을 맺은지 40년이 넘어 반세기에 가까와지고 있다.
3년간의 고교시절은 그후 40년이나 되는 삶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때 맺은 인연들은 지금도 계속되며 인생의 동반자로써 같은 시대를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부분의 우리 친구들의 자식들은 벌써 우리가 겪었던 고교 과정을 마쳤고, 현실사회의 한 축을 맡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다.
치열하게 학창시절을 보냈던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비교적 단조로운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드러낼만한 이야기는 없지만 이 글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하고 숨겨졌던 재미있는 비화들을 공개하여 지난 시절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우정을 돈독히 하는 계기로 만들기 위해 먼저 시작한다.
마음 속에 깊이 갈무리하여 두었던 재미있는 추억들이 이곳을 통해 공유되기를 바란다.
=================================================================================
1. 춘천으로
내가 졸업한 학교는 양구중학교다.
군청소재지에 있었지만 한 학년이 2개반 120명밖에 되지 않는 남녀공학의 작은 학교였다.
2학년때까지 내가 어느 고등학교로 진학하겠다는 목표가 없었다.
중학교를 입학하였으니 그냥 학교를 다닌 것일 뿐이었다.
2학년때 나보다 3년이 위인 친척 아저씨벌이 되는 분이 우리집에 다니러 왔다.
그 아재는 춘천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 데 아재는 춘고를 가야 한다고 강조를 했다.
인문계 고교로 진학을 해야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또, 춘천이 가까운지라 많은 친구들이 춘천고로 진학한다고 하여서 군중심리에 휩싸여 춘고로 가겠다고
결심하였고 부모님께도 고등학교는 춘천으로 보내달라고 졸랐다.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당시 춘천으로 나온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나는 고모댁이 춘천에 있으니 고모댁에서 먹고 다니면 될 것이라고 순진한 생각을 하였다.
입학원서를 쓸 때가 되니 선생님들은 양구농고(당시 학교이름)로 진학을 하라고 권하였다.
부모님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생각하라는 것이었는 데 당시 양구농고는 정원의 절반도 채우지 못할 때였다.
막상 원서를 쓸 때가 되니 춘고를 지망하겠다는 친구들 다수가 양구농고로 지망을 바꾸고(가정의 경제형편 때문이었으리라) 최종적으로 10여명이 춘고원서를 쓰게 되었다.
그때 같이 춘천에 나온 친구들이 최문성, 박제호, 김종성, 신명철, 김도영, 박승균, 권석봉, 김병준,임현간 등이이다.
2. 입학시험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12월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험을 보러 긴장된 마음으로 춘천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 당시는 소양댐이 생기기 전이라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렸다. 인제서 넘어오는 버스였는 데 수험생으로 보이는 녀석이 타고 있었다.
누군가가 시험을 보러 가느냐고 물었고, 같은 학교 시험을 보러 간다는 것을 알고 둘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가 경기도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이영만이었다.
영만이는 춘중을 다녔기 때문에 영만이를 통해 춘중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시험을 치르러 학교에 가보니 내 수험번호가 363번이었는 데 영만이가 364번으로 내 뒷 번호였다.
첫날은 필기 시험을 치르고, 둘째 날은 체력검사를 하였다.
2-3일후 발표가 났는 데 6.25때 우리 또래가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경쟁률은 높지 않았다.
양구에서 같이 나온 친구들도 100% 합격하였다.
3. 입학
3월 2일인지 3일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두려움 반 설레임 반으로 등교를 하였다.
운동장에 모여 반편성을 하였는 데 2반에 배정되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교실로 갔는 데 담임선생님은 안경섭 선생님이었다.
출석번호를 정하기 위해 복도에 키 순으로 서는 데 조금이라도 키를 커 보이게 해서 뒤로 가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한명이 더많은 것이었다.
선생님이 다시 세어 보아도 한명이 더 많았다.
그 한명이 누구인지를 찾으려고 이름을 부르는 데 다른 반 녀석이 이름을 부르며 찾으러 왔다.
한 녀석이 다른 반으로 가는 데 뒤에다가 많은 친구들이 한마디씩 욕들을 하였다.
나는 25번이 되었는 데 조정국이와 짝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왔다.
양구에서 같이 온 친구들 중 나와 같은 반에 배정된 녀석이 없어 처음에는 무척 긴장이 되었다.
3. 촌놈의 에피소드
입학 당시에는 고모댁에서 학교에를 다녔다.
중앙시장 뒤였기 때문에 점심을 먹으러 집에를 갔다. 점심을 먹고 허겁지겁 학교에 왔지만 5교시 수업에 늦고 말았다.
나말고도 늦은 녀석들이 더 있었다.
그 시간은 기하시간이었는 데 선생님은 유명한 최동언 선생님(별명 '어퍼')이었다.
선생님은 늦은 녀석들을 꿇어 앉히고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양구중학교를 나왔다고 하자 "이~ 촌놈이구먼" 하더니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춘중을 나온 녀석들은 "큰집에 왔다고 까부누먼~"하더니 두대씩인가 얻어 맞고 들어 왓다.
입학후 며칠되지 않았을 때다. 잠을 자기 전에 변소에를 다녀 오는 데 고모가 마루에 있는 백열등 불을 끄라고 했다. 대답은 하였지만 어떻게 불을 끄는지 몰랐기 때문에 우물쭈물하고 있은 데 고모는 다시 재촉을 하셨다.
끌 줄 모른다고 말도 못하고 다시 우물쭈물하자 고모부의 웃으시는 소리가 났다.
"동현이가 불을 끌 줄 모르는 모양이다. 영호(고종사촌동생, 1년후배)야 네가 가서 불을 꺼라."
영호가 나와서 불을 끄고 방안에서는 한바탕 웃음 소리가 나고.....
4. 마(魔)의 화요일
가장 긴장되는 요일은 화요일이었다.
이날 기하와 독일어 음악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요일에는 학교에 가기가 싫었다. 아주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독일어는 일주일에 한 시간이 들었는 데 백시덕선생님은 춘고에서 나를 모르는 녀석은 간첩이라고 하였다.
무슨 변화를 외우라고 했는 데 뜻을 모르니 외우지도 못하고...
선생님은 너, 너, 너.. 하면서 '데어데스뎀덴.....'을 외우라고 하고 못 외운 녀석들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다씩 얻어 맞는 데 그 소리가 엄청나게 커서 다른 녀석이 맞는 모습만 보아도 기절할 지경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외우기는 외웠는 데 막상 선생님 앞에서 외우려니 겁에 질려서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공부좀 하라우"하는 소리와 함께 뺨에서 불이 번쩍 났다.
소리는 크게 났지만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음악시간은 더 공포의 시간이었다.
정대범선생님은 처음 소개시간에 자기 이름이 정말로 큰 호랑이라고 하면서 시창에 불합격하는 녀석들이 받을 벌에 대하여 겁을 주었다.
원래 음치인 데다가 콩나물 대가리를 읽을 줄 몰랐으니 시창을 제대로 할 리가 만무...
음악실에 가면 오선 칠판에 악보가 그려져 있고, 선생님이 피아노를 치면서 악보를 따라 하게 하고
그 다음에는 먼저 시간에 배운 것을 도레미파로 불러 보게 하였다.
시창을 하는 소리를 듣고 점수가 즉석에서 발표가 되고, 10점과 20점을 맞은 녀석들은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얻어 맞고 들어와야 했다.
나는 야구 방망이로 얻어맞는 단골이었고, 나말고 단골이 몇녀석 더 있었다.
기하 시간은 이상한 시간이었다.
어퍼 선생님이 웃겨 놓고 웃는 녀석들은 붙들려 나가 머리를 바닥에 박고 엎드려야 했다.
들어 올 때는 맞고 들어와야 하고....
선생님 특유의 충청도 사투리에 웃음이 나오는 데 웃을 수가 없었다.
위의 잇빨을 아랫 이빨에 엇갈려 넣고 억지로 웃음을 참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또,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고 물어서 춘중을 나온 녀석은 곱배기로 맞고 들어와야 했다.
어느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잡혀 온 한 녀석에게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고 했고, 그 녀석은 강릉중학교를 나왔다고 했다(사실은 춘중을 나왔음) 순간적으로 선생님은 판단력을 잃었고(촌놈이라고 할 수도 없고, 큰 집에 나왔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런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던 조시연이 녀석의 입에서 이상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생님은 화가 나서 시연이를 불렀고, 시연이는 공포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앞으로 나갔고,
시연이를 추궁하던 선생님은 시연이의 웃은 사연을 듣자 껄껄 웃더니 녀석들을 혼내지 않고 그냥 들여 보냈다.
그후 어느 기하시간이었다.
수업시간에 걸린 녀석에게 선생님이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고 물었는 데 조규형이가 혼잣말로 하바드를 나왔다고 했다.
혼자 중얼거린 소리였는 데 어퍼 선생님이 이 소리를 들었다.
선생님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서 규형이를 불러 내었고, 규형이를 엎어 놓고 큰 몽둥이로 몇대를 후려 갈렸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그렇게 때릴 필요까지는 없었는 데 심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규형이도 이 사건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화요일만 지나면 일주일이 다 지난 것 같았다.
어쩌다가 화요일이 공휴일이기라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
다음에는 시험 이야기와 돈 빼앗긴 이야기, 자율학습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기대하시라.
2007년 동기회 카페에 기고한 글
'지나간 고교 시절 돌이켜 생각하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나간 고교시절 돌이켜 생각하니 - 소설 분지(糞地) 사건 (0) | 2013.09.14 |
---|---|
신문 사설 공부(1966.9.6 - 9.10) 주한미군 감축론외 (0) | 2013.09.10 |
월남전 참전용사 환송 (0) | 2013.08.29 |
지나간 고교시절 돌이켜 생각하니(2) - 자습시간, 과학반 폭발사고 (0) | 2013.08.24 |
양구 촌넘 춘천으로 유학오다. (0) | 2013.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