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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고령화 문제 교회도 비껴가지 못하고 있다.

 

출산율이 감소하고 평균수명이 늘어나며 노년층의 숫자가 증가하여 국가적으로 고령화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농촌 지역은 젊은 층이 도시로 빠져나가 아기 울음 소리가 그치고 노인들만 남은 곳이 되었다.

어린이와 청년들이 사라진 농촌 지역은 노인들만 남아 지역사회의 활력이 줄어들고 지역사회는 쇠퇴하여 소멸해 가는 과정에 있다.

농촌 마을 공동체를 통해 전승되던 문화도 지역사회가 소멸되어 감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고령화의 그림자는 이미 대부분의 분야에 드리우고 있다.

학교는 학생수의 감소로 학교 규모가 줄어들고 마침내는 분교장으로 격하되고 폐교의 과정을 겪게 된다.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산업도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취학대상이 감소함에 따라 대학들은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필자의 고교 동기생이 15년전쯤 수도권 어느 전문대의 총장을 한 적이 있다.

전문대의 총장들이 모이면 벚꽃선을 따라 학교가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강원도 지역의 전문대는 벌써 20여년 전부터 학생수 감소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10여년전부터 학생수 감소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학과가 폐과가 되고 존속되는 학과도 취업이 잘되는 몇몇 과를 제외하고는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학생수 감소로 인한 발등의 불은 4년제 대학에도 떨어졌다.

강원도 동해시에 있는 한중대, 전북 남원시에 있는 서남대 등 4년제 대학 중 문을 닫은 대학들도 생기게 되었다.

폐교가 되지 않은 다른 학교들도 학생수 감소로 몸살을 앓고 있다.

수도권 대학들과 포스텍, 카이스트 등 몇몇 특성화된 명문대와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제외하고는 지방의 대부분의 대학들이 학생모집에 문제를 겪고 있다.

지역 거점 국립대인 강원대도 학생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1차 모집 정원은 채우지만 복수 합격으로 합격자의 이동이 되면 성적 우수자들이 상위권 대학으로 이동하고 그 자리를 하위권 대학의 합격자들이 메우게 되는 데 가장 하위권의 대학은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지 못하고 결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결원 사태는 지방 소재 대부분의 사립대가 겪고 있고 지방 거점 국립대까지 결원으로 인한 문제를 겪고있는 것이다.

대학이 폐교가 되거나 폐교까지 이르지 않았다고 해도 학생수가 감소하면 대학 주변에서 방을 제공하는 원룸이나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서비스 업종들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인구 고령화는 농촌 지역이나 교육 분야 이외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농촌과 교육 문제외의 다른 문제는 논외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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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신교회)에도 인구 고령화로 인한 위기가 닥치고 있다.

출산율 저하로 아동과 청소년 층의 절대수가 감소하니 교회에서도 아동과 청소년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청소년 아동 층의 절대수 감소와 함께 이들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의 변화도 아동과 청소년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필자는 '1969년부터 2004년까지(중간 중간 중단은 있었지만) 교회학교에서 아동부와 중고등부 교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

필자가 처음 교회학교 교사를 하던 1970년대 초 교회는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놀고 활동을 할 수 있는 열린공간이었다.

도시에서는 초등학교의 경우 한 학급에 80명씩 수용을 하였고 중학교는 70명 고등학교는 60명이 학급 정원이었다.

비좁은 교실에서 많은 인원이 밀집되어 생활을 하다보니 학교는 재미가 없는 곳이었다.

또 담임 선생님도 80명 가까운 아이들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필자의 역량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필자가 중학교에 근무하며 담임을 했을 때 70명의 반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1:1 대응을 시키고 신상을 파악하고 이름을 불러줄 수 있기까지 두달의 시간이 걸렸다.

5월이 되어서야 담임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 간단한 신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린이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교사와 밀접한 인격적 관계를 맺기가 어려웠다.

또 집에서도 많은 형제들이 우글거렸고 부모도 먹고살기에 바쁘다 보니 부모의 관심을 받는 것도 힘들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방목된 상태로 양육되었다.

 

이런 사회 문화 환경에서 교회는 아이들에게 별천지였다.

개 교회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10명 정도의 또래로 구성된 교회의 학급에서 교사들의 관심을 받을 수가 있었다.

또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도 딱딱한 학교 수업과는 달리 노래와 율동 등 활동 중심이었고 저녁 예배에는 동화 시간이 있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필자의 경우 재미있게 구연동화를 하는 능력이 조금은 있었다.

동화시간에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가장 흥미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끊고 다음 번에 이어서 해준다고 하면 아이들은 아쉬워 했다.

예배가 끝나고 애들은 졸졸 따라다니면서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에 대해 물었고 나는 짦은 다른 동화를 해줌으로 이들의 요청을 대신하였다.

 

방학직수 실시된 여름 성경학교는 어린이들에게는 가장 흥미가 있는 행사였다.

교사들은 여름성경학교에 대한 교육을 미리 받았다.

어린이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각자의 재능에 따라 그림으로 교회당을 장식하고 교재를 만들고 율동과 노래를 연습하여 준비를 했다.

교회 주위 여러곳에 여름성경학교 포스터를 붙였다.

'80년대가 되면서는 제작된 포스터를 구입하여 붙였지만 '70년대에는 직접 그려서 붙였다.

교회당 건물과 어린이들이 모여드는 모습 시간 장소가 표시된 그림이었다.

대략 아래와 같은 양식이었다.

 

여름성경학교 기간은 5박 6일 정도였다.

월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토요일 오전까지 강행군을 하였다.

새벽 6시에서 7시 정도까지 새벽기도회를 하고(실시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

아침 9시에서 12시 정도까지 오전 활동을 하고

저녁 7시부터 9시정도까지 저녁 활동을 했다.

오전에는 전체 활동으로 어린이 찬송가를 부르거나 율동을 하였고 인형극을 보여주거나 그림이나 모형을 사용한 동화를 해주기도 하였다.

학급별로 성경을 공부하고 그림그리기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저녁에는 주로 전체 활동으로 율동을 하거나 게임을 하는 등의 신체 활동을 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예산이 충분하지 못해 충분한 지원을 못하였다.

교재 제작에 쓰이는 비용 정도를 제공하였고 교회 형편이 조금 나은 경우 어린이들에게 간식이 제공되기도 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교사들의 열성과 어린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대부분의 경우 여름성경학교는 성황을 이루었다.

주로 고등학생과 청년들로 구성된 교사들은 열성 하나로 1주일간의 자기 시간을 바쳐 여름성경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

교회에서는 장로님이나 집사님 가정에서 교사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였는 데 교사들끼리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큰 즐거움의 하나였다.

여름성경학교 마지막 시간에는 참가 어린이들의 출석과 활동 실적에 따라 시상을 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참가한 모든 어린이들에게 노트나 연필 등 학용품을 주었는 데 이것 역시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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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행사는 여름성경학교와 더불어 교회 어린이들에게는 가장 큰 행사였다.

교단의 교육부나 기독교 아동 교재를 출간하는 곳에서 성탄절 행사에 대한 프로그램과 교재를 발행하였고

지역 교회의 연합기구인 노회나 지방회 단위로 교사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한달 전부터 준비를 시작하였다.

성탄절 행사는 아동부가 중심이었는 데 어린이들은 성탄절 공연에 대부분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하였다.

성탄절 노래와 율동 연극 등이 주된 프로그램이었다.

또 산타로 분장한 교사가 나와서 참석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경우도 있었는 데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5-6세 아동들 중에는 분장한 산타를 진짜 산타로 믿는 경우도 있었다.

여름 성경학교때와 마찬가지로 성탄때는 출석 어린이들이 배로 늘었다.

TV가 나오기 전이라 어린이들에게 흥미거리가 없었고 여름성경학교나 성탄절 행사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50대 이상의 장년층과 노년층은 대부분 여름성경학교나 성탄절에 대하여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는 '70년대 - '80년대에 우리나라 개신교회가 양적 성장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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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중반부터 교회에 어린이들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베이붐 시대가 끝나 아동의 절대 숫자가 줄어들기도 하였지만 사회 문화환경이 변하면서 어린이들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한 방송 등 매체의 프로그램들이 흥미있어졌는 데 교회의 프로그램을 이를 따라잡지 못하여 점차 어린이들이 흥미를 잃게 된 것도 원인이 되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따라 교회의 예산도 전에 비해 풍부해졌고 교회학교에 대한 예산지원도 전반적으로 증가하였지만 아동 청소년 수의 감소라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큰 교회에서는 교육 담당 부교역자(교육목사나 교육전도사)를 채용하였고 장년층이 교사로 활동하는 등 교교육의 운영에서 전문성이 높아졌다.

또 아동부와 중고등부에 대한 예산지원도 증가하였지만 이미 기우러진 대세를 만회하지는 못하였다.

 

'80년대 후반부터 여름성경학교에 대한 지원도 강화되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참가 어린이들에게 간식을 제공하였고 T셔츠나 교재와 가방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 여름성경학교 실시 일수도 5박 6일에서 4박 5일로 3박 4일로 점차 단축되다가 1박 2일이나 길어야 2박 3일로 줄어들었다.

여름성경학교 운영 형식도 교회에 출석하여 활동하던 것이 교회에 따라 1박 2일 또는 2박 3일동안 교회 또는 다른 곳으로 가서 합숙을 하면서 진행하는 형태로 변화하여 갔다.

 

교단에 따라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모 교단의 경우 대략 1/3정도의 교회가 주일학교가 없다고 한다.

출석하는 어린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교회학교 교사로 활동했던 '70년대 초기 대부분의 경우 아동부와 중고등부의 인원이 장년부의 2-3배였으나 최근의 경우 교회 재적인원의 20%전후로 비중이 줄어들었다.

 

교회에서 교인들 평균연령의 상승은 아동과 청소년 층의 감소뿐 아니라 청년층의 감소까지 야기시켰다.

'90년대까지 교회 활동의 중심은 청년과 청장년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경우 활동의 중심축이 50대 - 60대로 옮겨갔다.

필자의 청년과 장년시절 교회 성가대나 주일학교 교사 등 교회 활동의 주축이 청년과 청장년층이었다면 지금은 50-60대 중심이며 청년층의 비중이 감소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장로 권사 집사 등 평신도 직분자의 정년이 70세다.

70세가 넘으면 원로라고 예우하며 의사결정에서 벗어나게 된다.

대부분의 교회의 경우 원로 직분자와 현재 활동하는 시무 직분자의 수가 비슷하다.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의 경우도 원로 직분자와 시무 직분자의 숫자가 비슷하다.

교인의 구성이 고령화가 되다 보니 장례 건수도 많아지고 있다.

3월 어느 한 주간의 경우 교우 자신과 교우 가정에서 장례 건수가 4건이었다.

이 주간 동안 새로 등록한 교우가 1명 새로 태어난 아기가 1명이었다.

위의 예는 어느 한주간의 경우라 이를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고령화로 인한 단면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한해동안 소천한(돌아가신) 교우의 숫자가 새로 태어난 아기의 숫자보다 많았다.

 

필자가 학교를 다니고 사회로 진출하던 20대였던 '70년대에 많은 유럽 교회들이 주로 노인들만 출석하고 젊은이들을 찾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는 데 50년전 유럽교회의 모습이 우리나라 교회의 모습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 다시 어린이들의 활기찬 모습과 청년들의 역동적인 모습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