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며 생각하며

추억 속의 성탄절 행사

성탄절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독교인에게만 국한된 명절만이 아닌 모두의 명절로 인식되고 있다.

기독교인이 다수인 나라뿐 아니라 북한과 같이 종교를 탄압하거나 일부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성탄절을 경축일로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독교가 전파된 19세기 말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성탄절이 경축일로 지켜졌다.

하나님의 외아들인 예수그리스도가 양이나 소가 머무는 외양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예수님 탄생의 이야기다. 온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의 탄생은 낮은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교회에서의 행사는 장년부의 경우 성탄절 축하 예배와 성가대의 특별한 공연이 중심이지만

어린이들은 크리스마스 캐럴 부르기와 율동 성극 등을 어른들 앞에서 공연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탄절 행사의 중심은 어린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필자는 어려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교회와 이웃하여 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성장하였다.

초등학교 3학년때 양구로 이사를 왔을 때 처음으로 교회가 보이는 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3학년때 담임 선생님이 교회를 다니는 분이어서 많은 아이들이 선생님이 다니시는 교회에 출석했다.

방학 전 선생님은 크리스마스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립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밤 감람나무 숲속에...."라는 노래의 첫 소절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교회에 다니는 찬구들이 있어 교회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으나 집에서 교회에 가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친구 따라 교회에 가지는 않았다.

같이 몰려 다니는 또래들과 같이 초가로 된 시골교회의 종각의 종을 치며 장난을 치다가 교회를 지키시던

할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달아났던 기억이 어린 시절 교회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3학년 가을 어느날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넥타이를 맨 젊은 청년이 우리집을 방문하여 교회에 다닐 것을 권하였으나 어머니가 좋은 말로 거절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산타할아버지가 착한 어린이에게만 선물을 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 맡에 선물이 놓여 있었다. 부모님이 산타할아버지였다는 것을 안 것은 그 후의 일이다. 필자가 살던 양구 시골에서 교회에서 하는 어린이들의 성탄절 축하 공연은 마을의 행사였다.

교회에 나가시지 않던 어머니도 그날은 동네 사람들과 같이 어린이들의 공연을 보러 교회에 가셨다.

그러나 필자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지 않았다. 멀리서 애들이 발표를 하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성탄절 새벽 우리집 마당에서 노래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밖에서 노래를 부른 교우들에게 준비한 과자를 주셨다. 이것이 필자가 경험한 첫 새벽송에 대한 기억이다.

 

그후 가오작리를 떠나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며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다.

이웃 마을에 교회가 있었지만 가까운 친구들 중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 없었고 부모님도 교회를 다니시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중학교때 외가 친척의 영향으로 기독계 이단으로 규정된 교회에 나간 적이 있다. 이것이 굴절된 모습이지만 기독교와의 첫 접촉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때도 몇번 나가 보았지만 진학을 포기하고 교회에 헌신하라는 말과 개인숭배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서 발을 끊었다.

고교시절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이 교회에 가자고 권하기도 했지만 궤변으로 기독교의 난해한 교리를 공격하며 교회에 나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대입에 실패를 하고 깊은 절망상태에 빠져 있을 때였다.

같은 반 친구였던 김철해와 같이 공원에서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하단에서 설명>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와의 대화는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재수를 했지만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지방 국립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서울로 가겠다는 꿈이 컸던만큼 실망도 컸다. 그때 하나님께 의지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났고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과에 다니는 친구에게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어보고 그가 다니는 교회에 스스로 나갔다. 그때가 대학 1학년 때인 5월이었다. 이때부터 거의 빠지지 않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였다.

교회에 출석한지 두달도 못되어 선배의 권유로 무슨 강습회에 갔는 데 여름성경학교 교사 강습회였다.

교회에 인적 자원이 부족하던 때라 여름성경학교 보조 교사를 맡게 되었다.

여름성경학교가 끝나고 어린이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러 나왔다가 선배에게 붙잡혀서

교회학교 교사의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다.

 

다음 해에 집 가까이에 설립된 소양댐 수몰지구에서 이전해 오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수몰지구 보상을 받아 건물을 이전하고 내평리에서 그 교회에 다니던 몇 가정과 교역자만 따라나온 교회라

신설교회와 마찬가지였다.

필자와 같은 교회에서 간 인종이와 이웃에 사는 후배 태완이와 삼총사가 되어 신설교회의 교회학교와 중고등부, 청년부 창설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특별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없던 시절 교회는 어린이들에게 놀이의 장이고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감당할 수 없을만큼 많은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1970년 성탄절 행사를 치렀다. 동역하는 주일학교 교사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짜고 연습을 시켜 어린이들의 성탄절 발표를 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생들은 이른 바 올나이트(All night)라는 것을 했다.

교회에서 밤을 새며 노래를 부르고 오락을 하고 떠들며 놀았다. 새벽에는 새벽송을 돌았다.

역사가 짦은 신설교회라 어른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중고등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몇몇 청년들과 집을 안내할 어른들이 조를 짜서 새벽송을 돌았다. 교우들의 가정에서는 온 집안에 불을 모두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저들 밖에 한 밤 중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의 크리스마스 찬송이 끝나고

"성탄과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가 끝나면 준비했던 선물 꾸러미를 주셨다.

이 선물들은 성탄 예배후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간식이 되었다.

애들은 성탄절 날 과자 등의 선물을 받는 재미에 교회로 몰려왔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연례 행사로 성탄전야에 어린이들의 공연이 행해졌고, 중고등부와 청년들의 크리스마스 이브 밤샘 행사가 행해졌다.

=============================================

 

그러다가 교사로 근무하게 되어 시골로 나간 후에는 시골 교회에서 성탄절을 보내게 되었다.

기억에 특별히 남는 것은 횡성 갑천에서 근무할 때다.

시골 교회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교우들이 많았다.

'70년대 후반 - '80년대 초반에 시골에는 승용차를 소유한 가정이 없었고 교회에도 차량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에 오려면 걸어서 오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큰 고개를 넘어 2시간 가까이 걸어서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있었다. 시골교회의 성탄 행사는 마을의 축제와 같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어린이들의 공연이 있었다. 성탄절 노래와 율동을 하고 연극을 하였다.

평소 교회에 나오지 않던 이웃 주민들도 어린이들이 발표하는 모습을 보러 교회로 왔다.

이 때에는 필자의 아들도 순서의 하나를 맡았는 데 마음이 무척 흐뭇했었다.

 

성탄절 공연을 하는 아들, 마이크를 잡고 있는 분은 어린이들을 지도하던 백집사 (1981년 성탄절)

 

공연과 예배가 끝나고 연령대별로 행사를 계속하였다.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청년들은 all night라고 하여 새벽까지 오락과 게임을 하며 놀았다.

새벽이 되면 예배를 드리고 새벽송을 돌았다. 몇개 팀으로 나누어 교우들이 사는 마을로 새벽송을 돌러 갔다.

교회에서 두 시간 가까지 걸어가는 곳에 사는 교우들도 있었다. 이런 곳까지도 빠지지 않고 새벽송을 돌러갔다. 당시는 필자가 젊은 시절이라 가장 멀리가는 팀에 편성되었다.

1시간이 훨씬 넘는 거리를 걸어서 갔다. 처음에는 비포장 도로이지만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갔지만 곧 시골 마을길을 따라 갔고 언덕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얼어붙은 개울 위를 징검다리를 건너기도 하였다.

마침내 교우의 가정에 도달하면 연세가 높으신 교우들이 불을 밝히고 기다리고 계셨다.

대문(사립문) 앞에 서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저들 밖에 한 밤중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 성탄절 찬송을 부르고 '기쁜 성탄과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로 새벽송을 끝냈다.

교우 가정에서는 우리를 들어오라고 하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만두국 등을 대접했다.

돌아갈 때는 정성껏 준비한 과자 등을 주셨다. 이것들은 다음 날 성탄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에게 주거나 점심을 같이 할 때 쓰였다. 

=======================================

 

1985년 춘천으로 온 후에도 같은 유형의 성탄절 행사는 이어졌다. 

시골서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먼곳까지 새벽송을 돌러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90년대가 되면서부터 아파트 단지로 주거가 바뀌기 시작했다.

새벽송을 돌러 가보면 다른 교회 팀과 마주치는 경우도 있었다.

아파트에 여러 교회 교인들이 모여 살다보니 교우들이 사는 곳을 찾아 여러 교회에서 새벽송을 돌러 오게 되었다. 이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분들에게 민원을 발생시키는 일이 되었다.

'90년대 중반부터 도시 지역의 큰 교회부터 새벽송을 도는 일이 중단되기 시작하여 새천년이 되면서 도시 지역에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성탄절이면 북적거리던 현상도 점차 사라지고 성탄절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줄어들었다.

교회에서도 저출산의 영향으로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의 수가 감소하고 성탄절을 성대하게 보내는 문화가 퇴조하면서 성탄절 행사가 축소되고 간소화되어 갔다.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착한 어린이들을 찾아오는 전통은 계속되고 있지만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롤도 들리지 않고, 쇼윈도를 장식한 점등 트리도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고, 성탄 전야 북적거리던 거리도 한산하게 되었고 성탄전야에 밤을 새우며 놀던 풍습도 사라지게 되었다.

어린이들의 성탄절 축하 공연도 점점 규모가 축소되어 예전처럼 설레이고 북적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성탄절이 기독교인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이 지키고 즐기는 명절이 아닌 단순한 공휴일의 하루가 되었다.

작년 성탄절은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별다른 행사가 없이 제한된 인원만 참가하여 예배만 드렸다.

물론 성탄절뿐만이 아니고 설 추석 제사 등 가족이나 혈연 공동체에서 행해지던 행사도 간소화되었고 핵가족 단위로 치러지는 행사로 축소되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성탄절을 지내며 예전의 북적이며 설레였던 성탄절이 그리워진다.

이제 설레임과 북적거리며 활기넘쳤던 성탄절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추억과 함께 조용히 사라져 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