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형님께
요즈음 형님이 보내시는 카톡을 하루에도 몇 번 씩 받습니다.
저를 생각하고 유익한 자료들을 보내주시는 것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가끔 쌀에 뉘섞이듯 받고싶지 않은 게시물이 전달되어 오기도 합니다.
태극기 수구 극우 단톡방에서 유통되는 그런 게시물들입니다.
그렇다고 저보다 한참 선배이신 형님께 대놓고 거부를 할 수 없어 마음이 번거롭습니다.
이글을 쓰면서 저는 형님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형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형님과 저는 ‘69학번으로 도청소재지에 있는 국립 지방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비록 같은 학번이었지만 형님은 월남전 참전까지 하시고 군에서 전역하여 입학하셨기에 저희들보다 나이가 몇 년 위셨습니다.
당연히 형님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형님과 저는 科가 달랐지만 같은 학부였기 때문에 1학년때 대부분의 교양과목 수업을 같이 수강했습니다.
그해 지방대학에서도 교련이 시행되었고 남학생들은 모두 1주에 2시간씩 교련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형님은 예비역이시지만 규정에 따라 교련수업을 수강하셨습니다.
’69학년도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한 삼선개헌을 추진하던 때였습니다.
전국의 대부분의 대학가에서는 삼선개헌 반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우리 학교의 경우 아직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는 데도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조기 여름방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휴교 중 전국에서 두 학교(그 중 한 학교가 우리 대학)가 개헌문제에 중립을 지키겠다고 학생회장 명의의 성명서를 낸 것입니다.
저는 이 성명서를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달리 반대의견을 표출할 수 없어 가까운 친구들과 이불 속에서 활갯짓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데 선배들이 와서 삼선개헌 반대 데모가 있으니 참가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저와 친구 인종이는 선배의 권유에 따라 시위 현장으로 갔습니다.
넓은 광장이나 거리에서 다수가 모여 데모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인원이 얼마되지 않아 방송실에서 연좌 데모를 하였습니다.
무기한 단식투쟁을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형님을 보았습니다.
반가왔습니다.
데모에 참가한 전체 인원이라야 30명이 못되었습니다.
방송실을 점거하여 책걸상으로 바리케이트를 쳐서 출입문을 봉쇄하고 방송시설을 이용해서 우리의 주장과 구호를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주장과 구호를 내보내고 삼선개헌 반대에 동참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는 성명을 낸 학생회장을 규탄하였습니다.
기자들이 오고 중정 요원들이 망원렌즈로 촬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학장님이(당시에는 단과대학이라 학장이 학교 행정 책임자) 교수님과 함께 오셔서 일단 의사 표명이 되었으니 해산하라고 설득하셨으나 지도부는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부모님들(주로 어머니들)이 오셔서 자식들을 불러내려 하셨습니다.
집에 급한 일이 있으나 나오라고 하였고, 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에 오시다가 사고가 났으니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몇몇은 마음이 흔들려 나가려 하였는 데 선배들이 참가자들을 끌어내려는 거짓말이니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모님들은 울부짖다가 귀가하셨고 우리는 방송실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밖에는 사복경찰과 정보부원들이 에워싸고 있었고 기자도 다녀갔습니다.
우리들은 다시 구호를 외치고 성토문을 발표했습니다.
교수님들이 오셔서 설득을 했고(해산하면 처벌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분명 기억납니다) 교수님들이 나가시자 집행부에서는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일부 집행부와 형님은 의사 표명이 되었으니 해산하자고 했고 환경운동의 초창기 멤버로 선도적 역할을 했던 선배 형은 끝까지 투쟁할 것을 주장해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형님을 비롯한 온건파(?)의 주장이 관철되어 시위를 시작한지 26시간만에 시위를 풀고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시위를 끝내고 해산하여 나올 때 울며 나오던 후일 환경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선배의 모습이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를 한 삼선개헌안은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어 박대통령은 한번 더 출마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헌안 통과후 10월이 되어서야 학교가 개강을 하였습니다.
저는 입학 후 5월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는 데 기독교 동아리가 있으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과 동기에게 물어보니 CCC(한국 대학생 선교회)를 소개하여 주었습니다.
일주 한번씩 빈 강의실에서 모였는 데 얼마 지나지 않아 춘천 중앙감리교회에서 지역의 다른 대학 학생들과 같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형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형님은 춘천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교회 담임 목사님의 조카로 목사님 댁에서 기거하며 학교와 교회에 출석하고 계셨습니다.
‘69년 춘천 CCC가 출범할 때는 전담 간사도 없었고 회관도 없었습니다.
장소는 중앙감리교회 김연호 목사님의 적극적인 협조로 교회 교육관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홍정길 간사님(후일 남서울 은혜교회 담임)이 금요일마다 오셔서 성경공부를 지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때 형님께서 모임을 주도하셨습니다.
1년 정도가 지나 회관도 세를 얻어 마련하였고, 윤수길 간사님이 전임 간사로 부임하셔 춘천 CCC가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70학년도 2학년때는 4년 재학기간 중 유일하게 데모로 인하여 휴강이 없었던 해였습니다.
3학년(‘71학년도)이 되며 강화된 교련이 실시되게 되었습니다.
예비역 교관이 현역 장교로 교체되었고 교련 시간도 주당 3시간으로 늘었습니다.
집체 교육도 실시한다고 했고 ROTC도 폐지되며 교련을 이수하면 6개월간 현역 복무기간이 단축되고 희망에 따라 병, 하사관, 장교로 입대한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강회된 교련 교육 방침에 대하여 교련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반대 시위가 일어났는 데 시위를 주도한 분이 형님과 ROTC를 하던 후일 환경운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선배였습니다.
예비역인 형님이 시위 주도자라는 것이 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가끔 형님은 월남전 참전 당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형님의 체험담을 통해 월남전의 형황과 전쟁의 참화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1971년 1월 CCC에서는 민족복음화 운동을 선포하였고 춘천지구에서도 이를 위한 복음화 요원 훈련프로그램을 운영하였습니다.
형님은 윤간사님과(후일 태국 선교사로 은퇴하실 때까지 평생 헌신) 몇면 열성회원들과 함께 준비에 몰두하셨습니다.
강원도 방방곡곡의 교회와 학교를 찾아다니며 훈련프로그램 참여를 권유하셨지요.
당시는 교통편이 불편할 때라 때로는 몇시간씩 걷기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는 식사때를 놓쳐서 시장했는 데 어느 집에서 제공한 식사를 너무 허겁지겁 하는 바람에 간첩으로 신고를 당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먼 훗날 듣기도 했습니다.
형님은 CCC에서 또 교회에서 신앙활동에 헌신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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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7일 박대통령는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국민투표로 확정을 하는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찬반 토론을 금지시키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물론 학교는 휴교를 했구요.
유신을 위한 공작이 진행되어 공포분위기가 온땅을 뒤덮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지역 신문을 보던 저는 신문 한면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던 성명서에 올라와 있는 명단을 보고 경악을 했습니다.
신문에는 수없이 많은 단체들의 지지성명을으로 도배가 될 때였습니다.
10월 유신 촉진 강원도민 협의회(?) 명의의 지지 성명이었습니다.
강원도의 지도급 인사들이 이름이 거의 모두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협의회 부의장에 형님의 숙부님이신 목사님의 이름이 올라있는 것입니다.
며칠 후 그 교회에서 행사가 있어 참석을 했는 데 형님을 만났습니다.
형님은 저를 불러 인적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신문에 광고가 나간 후 예배 광고 시간에 목사님께서 자신은 유신지지 성명을 한 적이 없고
광고를 낸 단체게 가입한 적도 없고 직을 맡은 일도 없으며 명의가 도용당한 것이라고 해명하셨다고 합니다.
그날 밤 중정요원들이 신발을 신은 채로 목사님 사택에 난입해서 목사님 서재의 책들을 뒤지고 일기장까지 꺼내 읽었다고 합니다.
이때 형님은 비분강개해서 말씀하셨고 저도 같이 비분강개했지만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용기가 없었고 힘이 미약했습니다.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12월이 되어 개강을 하였고 몇주 수업을 못한 채로 종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에 졸업식을 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잘 나가는 대기업에 취업이 확정되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신학대학원에를 진학하셔서 평생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저는 교사가 되어 정년을 1년 앞두고 명퇴를 할 때까지 교육현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간 가끔씩 형님 소식을 전해들었을 뿐 뵙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10년 쯤 지났을 때 형님을 댁으로 찾아뵌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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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형님을 뵌 것은 2019년 10월 춘천 CCC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였습니다.
그때 굉장히 반가왔습니다.
그때는 형님도 저도 모두 은퇴를 한 후였습니다.
젊은 시절 패기넘치는 형님을 뵈었었고, 그후 젊은 목회자 시절의 형님을 뵌 적이 있었는 데 어느덧 형님이나 저나 황혼기에 접어들은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2020년 2월부터 코로나가 전국을 덮쳐 국민들의 일상의 많은 부분이 중단되거나 변화를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은 흘러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어 가고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형님께서 제게 카톡을 보내주시기 시작한 것은 이때 쯤부터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가끔 톡이 왔는 데 대선 직전부터는 빈도가 높아졌습니다.
대부분은 재미있는 동영상이나 건강 노년기 생활 등에 대한 유익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가끔 태극기 수구 극우 부대가 공유하는 게시물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적으로 편향된 시국 관련 뉴스나 문정권의 실정을 규탄하는 내용, 문정권이 공산정권이고 국정파탄을 시키고 있다는 내용 등입니다.
이중 상당 수는 가짜뉴스입니다.
저는 이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의식구조가 변한다고 합니다.
대부분 보수화가 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젊은 시절보다는 많이 보수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들은 당시 받는 냉전적 사고와 이분법적 사고가 강화되고 고착화되면서 거의 신앙화된 강고한 의식구조를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들과 같은 사고를 갖지 않는 이념집단이나 진보진영을 주사파며 북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집권을 하고 있는 진보정당(견해에 따라서는 진보정당이 아닌 보수정당으로도 분류)을 북의 지령을 받는 주사파가 주도하는 정당으로 대한민국을 해체하여 북에 바치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을(공산화를) 막는 것이 애국이고 사명이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 좌파 주사파 공산화 주도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투쟁해야 하고 그 당위성을 주장하는 수많은 게시물들이 극우 유튜버들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는 데 그중 상당수가 가짜 조작 왜곡된 것들입니다.
제가 여기서 구구히 예를 들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서 제게 보내시는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문건들은 거의가 극우 유튜버들이 생산 유포시키는 것들입니다.
젊은 시절의 형님은 불의에 분개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셨습니다.
적어도 진짜와 가짜 조작된 것은 구별하실 수 있는 분별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말도 안되는 엉성한 가짜 뉴스를 전달하고 계신 것을 보며 서글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비단 형님만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저의 동기들도 형님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를 헷갈리게 하는 것은 긴급조치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한 친구가
군에서 공개적인 유신 투표를 할 때 반대표를 던졌다는 친구가 태극기 부대의 열성분자가 된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저의 제자 중에 동아일보 광고 탄압을 규탄하는 내용을 답안지에 적었던 녀석이 몇 년 전 뉴라이트 멤버로 성명서에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나이가 드는 데서 오는 보수화 성향 때문만은 아닌 다른 요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 바 진보정권이라고 하는 집권자와 그 핵심 지지층이 그만큰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고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주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형님 이야기가 너무 장황하게 길어졌습니다.
저와 조금은 생각이 다르고 제가 보기에는 황당한 게시물을 가끔 보내시기도 하지만 형님은 지난 반세기가 넘는 동안 제가 존경하는 선배였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달라진 형님의 모습을 보며 혼란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형님도 이제 팔순에 접어드셨습니다.
요즈음은 백세 시대라고 하지요.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6월 29일 부족한 동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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