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모셔온 글들

쥐고기도 맛있었던 추억(최중권)

아래는 필자의 고등학교 동기인 최중권군(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이 고교 동기회 카페에 올린 글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추억이다.

물결에 가랑잎 흔들리듯, 봄볕 나른함에 팔벼게 한 잔듸밭 넘어로  들려 오는 먼산 비행기 소리처럼  가슴설레는 것이 추억이다.

어제 밤은 양구 월명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는 고요함이 너무 좋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가끔 그곳에서 보내는 것이 즐거움이요  나만의 휴식 비결이다. 

 

퇴임 3년전부터 준비한 4평짜리 공간을 내가 보석처럼 생각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혼자 앉아도 꽉차는 공간이기에 몸 돌려 사방을 관리 할 수 있으며 등 따습게 잘 수있게 전기 난방이고 배곱으면 끓여 먹을 수 있도록 씽크시설도 돼있으니 공간 작아 관리 쉽고 문만 잠그면 별도 관리 할것도 없어 편하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개울과 호수라 이름 짓고 보석처럼 아낀다. 지금의 월명리는 양구 읍내에서 자동차로 20여분 걸리는 곳이지만 아주 오래전 내가 젊은 시절 4년을 보낸 공수분교에서도 큰 고개를 넘어야하는 곳이었던 대한민국 최고의 벽촌이  월명리 였다.

친구 홍창선 내외가 근무하던 도일분교 옛터 바로 아래 개울가에 작은 공간을 마련 하게 되었는데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작다는것에 보탠다면 낚시터가 가깝다는 이점 때문일 것이다.

그 곳 개울과 호수라 이름지어진 곳 전체 넓이라야 170평  공간이다.

그 곳 얼명리를 좀더 소개하면 지금도 오지 중 상 오지이지만 옛날 월명리의 옛날 교통은  배를 타고 화천땜으로 갈때도 두시간, 

걸어 고개를 넘어 양구읍내 가려해도 두세시간 걸어야 하는 곳에  친구  홍창선 내외가 4년을 살았으니 존경스럽도록 놀라운곳이다. 

 

두 내외의 고생에 비하면 내가 살던 공수분교는 그래도 형편이 양반이었다. 

도일분교 옛터 바로 아래 개울가에 작은 터를 퇴직전에 구입한 사연도 흥미롭지만 그이야기는 기회를 만들어 다시 하기로 하고 오늘은 공수분교장에서 쥐고기 먹게된 이야기로 중심을 잡도록 하겠다.

조립식으로 지은 아주 허름한 컨테이너식 구조물 바로 앞은 개울 서쪽으로는 50m 아래로는 파라호가 넓게 펼쳐진 곳 아주 조용한 구석이다. 집주위는 큰 돌들이 둘러샇았고 숙소 뒤로 작는 채소밭이 20평 쯤 있는데 가끔들어가 가꾸는 재미가 쏠쏠하여 올해도 각종  씨앗을 챙겨 들고 가려는 것이다.

올해에는 고구마와 옥수수수를 심을 것이다.

우선 땅을  일궈야 겠다는 생각으로 출발전에 방과 주방  전기 고장이 생각나 제자에게 전문가를 소개 받고 출발을 하였다.

 

도착하니 전기는 수리 되었고 제자들이 저녁에 만나자고 한단다.

전기밥솥에 밥을 언져놓고 손바닥만 채마밭를 일구니 해는 뉘엇뉘엇 서산에 걸치는데 제자 두녀석이 왔다. 나가잔다.

월명낚시터 영업집에 메기운탕을 예약 했다니 내 정성들여 만든  돼지고기 두루치기는 뒤로 밀리게 됐다.

탕을 가운데 놓고 밥을 뜨려는데 나인수라는  제자 녀석의 한마디가 추억을 흔든다. 

선생님은 쥐고기 잘드시는데 메기매운탕이 입맛에 맞으실라나 ??? 설렁줄 처럼  추억이 파문되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추억은 거칠어도 아름다운것이다.

 

 분교장 근무시절 늦가을이면 교실 땔감은 장작을 구입했으나 관사에 겨우내 때야하는 나무는 학부형들이 산에서 솔가지를 제켜 두었다가 12월 말경 등짐으로 옴겨와 낫가리로 쌓아두면 겨우내 빼때고 다음해 까지 화목으로 사용하게되는 땔감이니 낫가리 쌓는 날은 매우 중요한 한해 농사와 같이 신경을 써술과 안주등을 준비한다.

학부모는 학부모 대로 학교에 봉사하는 행사로 참 고마움을 주고 받는 큰 행사 날이다. 

나는 나 대로 일년 온 가족 몸을 뎁혀줄 농목가리를  가리는 날이라 새벽 부터 분주 했다. 바로 그날의 이야기다.

 생애 최초로 먹어본 쥐고기의 사연이 펄쳐졌던 그날의 이야기.....

 

 아이들이 처음부터 봤다는 쥐고기 사건은  막걸리 두 말과 돼지고기 열근이 뒷 논에  쌓인 나무 단주위 가운데 황덕불에서 구수한 냄새와 함께 구워지고  동네 사람들의  흥겨움과 고함이 함께 골짜기가 시끄러울때 발생하였다.

 쌓였던 나무들은 간이목욕탕 옆 공터에 낟가리로 쌓여져 높아지고  비례하여 흩어졌던 나무단 몇 단이 마지막을 기다릴때 그 나뭇단주위에서 난리가 났던 것이다. 

신발짝만한 대형 쥐란 놈이 생존을 위한 탈출이 시도되고 사람들은 한마리 쥐를 중심을 난리법석이 난 것이다. 

많은 사람들 속에 흥분의 기름이 된 것이다.

결국은 짓궂은 청년에게 쥐는 잡혀 꼅질까지 벗겨저 황덕불로  던져지니 돼지고기 냄새와 쥐고기 냄새가 엉켜 진동하니 논바닥에 있는 온 동네 사람들의 코끝은 흥분되고 있었다.

그러나 더 큰 관심은 누가 그 고기를 먹느냐다.

짓궂은 청년은 벌써 속으로 나를 지목하고 있었는지 노랗게 익자마자  살집 통통하고 노랗게 잘 익은 뒷다리를 풍섞인 잡소리와 함께  쭉찢어져 맨 먼져 내 코맽에 디밀었다.

난감하다. 마을 어른들도 모두 한 점씩들고 눈치를 본다.

나는 한바가지 막걸리를 들이키고는  왕소금 밑으로 자글자글 기름기 도는 쥐고기를 입에 넣고 씹었다.

어라!!! 모두의 눈길이 모두 내 얼굴로 쏠려있다. 생각은 징그러웠으나 오히려맛은 소고기 맛이다.

그야말로 쥐고기 파티의 시발은 나의 용기였다.얼굴은 억지 였으나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은  그 고기맛은 향기로 남아있다. 

지금 다시 준다면 먹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주장합니다.

주면 나는 먹을 수 있다.

 

그날 부터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쥐고기 먹은 선생님의 용기는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다. 쥐고기 맛 일품이다.

추억의 쥐고기와 함께한 셋이 먹은 메게 매운탕은 또 추억으로 이어질 것이고 내가 그들을 그리워하는한 제자들이  또 그리워 질 것이다.

 

경동현 13.05.09. 22:36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니 고기 냄새가 나며 화로 위의 석쇠에서 고기가 지글대며 익고 있었다.

어머니는 일곱 살 밑의 남동생에게 그 고기를 먹이고 계시고, 동생은 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 고기를 한점 먹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그런데 내게는 고기 한점 오지 않았다.

무슨 고기냐고 아버지께 여쭈어 보니 서육이라고 하신다.

서육이라는 고기는 처음 듣는 고긴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이 먹은 고기는 쥐고기였고...

아마 앓고난 동생에게 영양보충을 시킨 모양인데, 고기를 살 형편이 못되었던 시절 쥐를 동생에게 먹인 것으로 생각되는 데....

당시 지렁이도 보신용으로 먹이기도 했다는 데...

 

2013년 5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