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인구가 1천만이라고 한다.
산책로를 걷다보면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마주치게 된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에도 개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가구가 꽤많다.
반려견 전성시대가 도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개는 인간의 동반자로 원시시대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왔다.
주인이나 주인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 충견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배운 교과서에 나온 개와 관련된 이야기들 중 두가지가 기억된다.
하나는 '알프스의 개' 이야기인데 나무를 하러 산에 간 아버지를 찾아나선 남매가 메아리 소리를 아버지의 대답소리로 착각하여 아버지가 입산한 골짜기와 다른 골짜기로 들어갔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아이들이 없자 당황했는 데 기르는 개가 짖으며 앞장을 서 아이들이 들어간 골짜기로 들어갔고, 아이들을 공격하려는 늑대와 개가 혈투를 벌리는 동안 뒤쫒아온 아버지가 늑대를 죽이고 아이들을 구했지만 상처를 입은 개도 죽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또 눈과 혹한으로 고립된 알래스카의 어느 도시에 전염병이 유행했는 데 개썰매로밖에는 약을 운반할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가슨이라는 유능한 개썰매 몰이꾼이 개썰매에 약을 싣고 밤낮을 달려 항구에서 내륙도시로 달려갔는 데 바르트라는 선두에서 달리던 우두머리인 개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힘에 지쳐서 죽었고, 도시 사람들이 개의 동상을 세워 기념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렸을 때 '프란다스의 개'라는 동화를 눈물을 흘리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에도 술취해 잠든 주인을 몸을 던져 산불에서 구했다거나 하는 충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인간과 개는 오랜 세월을 서로 교감을 하며 살아왔다.
필자가 어린시절 시골에서는 대부분의 농가에서 개를 키웠다.
개를 사육하는 목적은 식용이나 판매를 위해 길렀지만 주인 식구들과 개 사이에는 우정이 존재했다.
필자의 집에서 기르는 개는 내가 어디를 가려면 앞장을 서서 따라나섰다.
어머니가 오시면 뛰어나가 마중을 했다.
또 개는 어린 나와 동생들의 놀이 친구였다.
개가 팔려간 날 우리 형제들은 모두 슬퍼했지만 어머니가 사오신 강아지에 정을 붙이며 팔려간 개에 대한 슬픔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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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간과 개는 여전히 가까이 살면서 교감을 이루고 있지만 개를 키우는 환경과 관계는 예전과는 달라졌다.
우선 개가 생활하는 공간이 마당이 있는 집에서 폐쇄적인 구조의 아파트로 바뀌었다.
묶이지 않고 마음껏 산과 들을 동료들과 뛰어다니며 놀던 개들이 이제는 아파트라는 폐쇄된 공간에 갇혀서 생활하게 되었다.
주인과 함께 바깥 나들이를 하는 선택받은 개들도 있지만 몇년전만 해도 목줄에 묶이지 않고 주인을 따라다니며 잠깐 주인의 시야를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짧은 목줄에 묶여 주인과 같이 움직여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비록 자유를 속박당했지만 많은 개들은 수십년전의 조상들보다 사람에게서 많은 애정과 보살핌을 받고 있다.
필자는 2월말까지 3년간 주 5일간 오후에 파트타임으로 인터넷의 블로그 카페 등에 올라오는 게시물 중 명예훼손이나 저작권 침해 개인정보 초상권 침해 등 권리침해에 대한 신고가 있는 경우 기준에 따라 이를 게시중단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반려견 문제로 인한 게시중단 요청도 상당수가 있었다.
동물병원이 개를 치료하다가 의료사고(?)를 내어 개의 증상이 악화되었다거나 폐사하였다는 데 업체 측에서 책임회피나 무책임한 대응을 했다거나 불만이 주류이다. 그러나 개 사료에 대한 불만, 개 미용실이나 애견용품에 대한 불만 입양된 강아지가 병이 든 개였다거나 개의 품종이 원하는 품종이 아니고 믹스견(잡종)이라든가 하는 개와 관련된 고객 불만이 애견 카페 등에 올라온다.
이를 알게된 업체 측에서는 이용자의 불만이 과장되었다거나 사실무근이라든가 이미 해결되었다고 하여 게시중단을 요청하게 된다.
그런데 게시물을 올린 애견 사육자들은 '개'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았다. 개를 꼭 아이들이라고 호칭하였다.
견주(犬主)인 자신을 아빠나 엄마라고 표현하였다.
개는 어느덧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작년의 일이다. 어느 젊은 여자가 유모차를 끌고 오기에 아기가 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들여다 보니 아기가 아닌 반려견이 유모차에 타고 있었다.
한번은 아기를 업고가는 여자가 있어 보니 아기 대신 반려견이 등에 업혀 있었다.
반려견이 가족이 된 것이다.
필자의 친구나 지인들 중 개를 기르는 분들의 이야기는 한결같다.
개처럼 충직한 동물이 없고 사람을 따르고 정을 주고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 어린 시절 잡견(이른 바 똥개)을 길렀지만 나를 따르던 개에 대한 추억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파트라는 밀폐된 주거환경에서 개를 길러야 하는가? 개를 아이라고 호칭하고 자식처럼 대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전적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어린 시절 집에서 기르는 개의 평균 수명은 3-4년을 넘기가 어려웠다.
새끼를 서너번 낳으면 팔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른들은 개나 닭 등 가축을 오래 기르면 요물(妖
물론 정서장애가 있는 어린이나 자녀들이 모두 떠나고 배우자를 사별했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별거하는 경우, 사람과의 관계가 소원한 현대 도시인의 생활형태 속에서 반려견이나 반려동물은 인간의 외로움과 소외감을 줄여주는 좋은 친구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과의 관계맺기가 멀어지는 대안을 반려견과의 관계 속에서 모색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다.
노인이 개를 업고 다닌다거나 유모차에 태워서 데리고 다니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지만 젊은 여성이 그렇게 하는 것은 동의할 수가 없다.
개를 친구로 삼고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는 젊은이들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가정을 이루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반려동물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반려동물이 가족의 일원이 된 문화가 소원해진 인간관계로 인한 현상의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또 반려견으로 인한 이웃과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개에게 성대수술을 해준다거나 중성화수술을 해주는 경우가 많은 데
이것이 과연 개의 입장에서 볼 때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든다.
'나'라는 인간만 존재하는 시대에 그나마 함께 있어 정을 주고받고 교감을 할 수 있는 반려견이라는 존재가 인간 소외를
줄여주는 바람직한 대안인가?
동물도 생명체이니만큼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관계가 소원해지는 데 대한 대안으로 반려동물이 등장한
현상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상이다.
사회변화의 거대한 물줄기가 다시 인간관계의 회복과 공동체의 부활이라는 방향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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