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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오랜 벗을 떠나 보내며

효섭군. 자네에게 편지를 써보는 것이 몇년만인지 모르겠군.

아마 45년만일 것 같네. 자네가 육군사관학교에 다닐 때 우리는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지.

봉투에 군우 00-000로 시작되는 주소로 편지를 보냈지.

어떤 내용의 편지를 주고 받았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아마 인생의 의미와 꿈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네.

자네가 육사를 떠나 사회에 나온 후 더 이상 편지의 왕래는 없었던 것 같네.

서로의 삶에 바쁘기도 했고, 편지를 주고받는 문화가 퇴조했기 때문이기도 했지.

그런데 45년만에 자네에게 편지를 쓰네.

이번에는 수신인이 받을 수 없는 편지군.


그저께(11월 5일) 자네의 부음을 듣고 문상을 하러 오가며 많은 생각을 했네.

知友 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60년 4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부터였지.

나는 선친의 근무지를 따라 광덕 초등학교에서 원당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지.

원당초등학교에서 수업 첫시간에 자네를 본 모습은 뚜렷하게 기억되네.

정수와 싸웠는 데 하필이면 정수의 눈두덩이를 때려 정수의 눈이 충혈되어 있고

둘이 불려나와 선생님에게 혼나던 모습이 자네를 본 첫모습이네.


자네와 나는 대를 이은 인연이었지.

우리 아버지와 자네의 아버지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셨고, 자네의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는 한 동네에서 자란 동무였지.

원당초등학교에서 만난 우리는 곧 친한 친구가 되었지.

知友 의 집에 내가, 우리집에 자네가 수도 없이 들락거렸지.

무슨 놀이를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지냈는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네.

다만 장기를 둔 것만은 기억나지.

한번은 우리집에서 장기를 두었는 데 그날은 내가 많이 이겼지.

知友 가 이기고 끝내려고 더 두자고 하는 것을 내가 그만 둔다고 하자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것이 기억나는군.

그뒤 자네가 어디서 장기의 수를 배웠는지 내가 더 많이 진 것 같네.


知友 는 내가 넘어야 할 산이었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네.

초등학교 시절 자네가 나보다 공부를 잘했지.

특히 수학을 잘한 것으로 기억나네. 그때 나는 교과서에 나온 산수 문제도 잘 풀지 못해 쩔쩔 맸었네.

知友 보다 앞서고 싶었지만 한번도 앞서지를 못했지.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자네와 나는 학교가 달라지게 되었지.

선친께서 나를 춘천중학교로 가게 해준다고 하셔서 나름 공부를 했는 데 원서를 보니 양구중학교였네.

知友와 종승이 준섭이 셋이서 춘중으로 시험을 보러 가고, 나와 명식이, 영옥이, 경화 등은 양구중학교로 갔네.

선친은 자네가 춘중에서 아주 공부를 잘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

나중에 고등학교 때 만난 춘중을 같이 다닌 친구들에게, 자네에게 들은 이야기네.

양구에서도 시골인 원당리에서 나간 시골뜨기를 춘천에서 입학한 녀석들은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고 하네.

춘천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녀석들은 끼리끼리 어울렸지만 자네는 한 구석에 혼자 고립되어 있었다고 하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나는 것은 첫번째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서였다고 하네.

담임선생님이 성적발표를 하는 데 1등이 정효섭이었다고 하네.

학급 전체가 놀랄 수밖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지. 춘천에서 온 녀석들끼리 누구누구가 일등일 것이라고 이야기가

오갔는 데 시골에서 혼자 온 정효섭이가 일등을 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었다고 하네.

그뒤 반전이 일어났지. 자네 주위에 애들이 모여들고, 도시락을 먹을 때 소위 잘나가는 애들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지.


우리는 방학때 자주 만났었지.

그러다가 우리집이 창리로 이사를 가며 방학때 만나는 것도 뜸해졌지만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지.

고등학교는 춘천으로 갔기 때문에 춘천고등학교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지.

초등학교때와 마찬가지로 자네는 내가 넘어야 할, 앞서야 할 대상이었지.

자네 성적에 촉각을 세웠었네. 그런데 자네가 성적이 좀 떨어진 적이 있었어. 그때 처음으로 내가 자네보다 성적이 앞섰었지.

그때 기쁨이란....

1학년 말 어쩌다가 학력고사에서 한자리 전교등수를 차지했는 데 그것을 계기로

나도 이른바 잘나가는 애들과 함께 하는 위치가 되었지.

고교시절 우리는 경쟁자이자 친한 친구였지.

서로의 집에 많이 놀러 다녔고, 밥도 같이 먹었고, 서로의 형제들도 잘 알게 되었지.


진학을 할 때  知友는 육군사관학교로, 나는 S대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여 한해를 쉬고 지방 국립대로 진학하였지.

자네가 육사에 입학했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知友 의 친족들이 경사가 났다고, 스타가 탄생할 것이라고 기뻐했었다네.

이종사촌 누님이 임당리 골말로 출가하여 사셨는 데 거기서 만난 집안의 어떤 어른은 할아버지 산소를 잘썼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知友가 첫 휴가를 나와 우리집에 왔을 때가 생각나네.

육사생도 정복을 하고 우리집에 왔을 때 자네는 동생들에게 경이의 대상이었네.

자네와 내가 함께 걸을 때 자네의 절도 있는 사관생도 걸음걸이에 동네 애들이 따라오며 구경을 했지.

어머니가 차려주신 점심을 같이 먹을 때였네. 당시 직각식사를 했던가? 특이한 식사방법을 동생들은 넋을 잃고 처다 보았네.

가을이었네. 자네가 효창운동장에서 있었던 삼군사관학교 체육대회 초청장을 보내주었지.

나는 서울에 가서 난생 처음으로 삼군사관학교 체육대회를 관람하였네.

전교생이 마치 한사람이 하는 것처럼 모든 동작을 맞추어 응원을 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네.

축구니 럭비니 하는 경기보다도 응원의 모습을 넋을 잃고 보았네.

경기가 끝나고 귀교를 하는 모습을 보려고 생도들이 버스를 승차하는 곳에서 기다렸네.

그때 운동장에서 대열을 맞추어 나오는 자네의 모습을 보았지.

자네도 나를 알아보고 빙긋이 웃고 버스에 오르던 모습이 기억나네.

가 사관학교 시절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었는 데 보관되어 있는 것이 없어 유감이네.


知友가 4학년이던 '71년 가을 정말 황당한 소식을 들었지.

졸업을 몇달 앞두고 학교에서 퇴교를 당했다는 소식을....

자네 아버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황당했네.

현역 사단장이 자네와 사이에서 있었던 사적인 일로 인해 감정이 폭발했고

감정이 고조되어 교장에게 전화를 해서 혼을 내주라고 했는 데, 교장은 과잉반응으로 자네를 퇴교조치했다고 하시더군.

나중에 감정이 가라앉은 사단장이 다시 전화를 해서 확인하니 퇴교조치가 되었다고 하자 교장에게 퇴교를 시키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며 다시 복교를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

후일 내가 양구에서 근무할 때 자네의 사관학교 동기들과 후배들을 만나는 일이 있어 물어보았는 데 퇴교될 사유가 아니었다고

억울하게 되었다고 안타까와 하더군.

퇴교되며 자네는 하사로 현역근무를 하게 되었지.

그때 절망한 자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자네는 월남전에 지원을 했고 베트남으로 파병을 가게 되었지.

자네가 훈련을 마치고 출발하는 날 자네의 어머니와 같이 역에서 자네의 모습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네.

장병들을 태운 열차가 역에서 서지 않고 통과를 하자 어머니는 땅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셨지.

전장(戰場)으로 출발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싶었는 데 열차가 그대로 통과하여 아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자네가 군에서 제대를 하여 취업준비를 하고 나는 교사로 발령을 받아 근무할 때였지.

그동안 자네는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재기를 위해 노력을 했지. 

7급 공무원 시험에 단번에 합격을 하여 상공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지.  

'76년 내가 결혼을 할 때 자네는 부산에서 근무하고 있었네.

토요일에 있었던 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먼길을 달려 온 것이지.

당시는 초임 시절이라 휴가를 내는 데도 많은 눈치를 보아야 했을 터이고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휴가를 낸다고 말하기는 더더육 어려웠던 시절이었지.


그후 우리는 각자의 삶에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했었네.

한번은 방학때 서울에 갔다가 정부종합청사 근처에서 우연히 점심식사를 하러 나오는 자네를 만났었지.

얼마나 반가왔는지. 자네는 나를 데리고 복어요리집에 가서 비싼 복어요리를 사주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네.


세월은 흘러가고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고, 아이들은 자라고......

바쁜 우리는 경조사 등 특별한 때가 아니면 자주 만나지 못했었지.

자네가 수출보험공사로 직장을 옮긴 한참 후였을 것이네.

서울에서 아주 가끔씩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데 한번은 유명한 족발집에서 자네가 사준 족발요리를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나네.


미국 지사장을 끝으로 퇴직을 하고 건강이 나빠지자 친구들과 만남을 단절하여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지.

자네와 인척이 되는 다른 친구를 통해 가끔 전해들은 소식은 정기적으로 투석을 하며 투병을 하고 있다고 했네.

전화번호도 공개를 하지 않으니 연락을 할 방법도 없고 갑갑하기만 했었네.

그러다가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밖으로 나왔지. 친구들 경조사에도 참석을 하고.

추석때 양구에 성묘를 갔다고 올 때면 나에게 연락을 했는 데 주로 밭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었지.

그때 밭에서 캔 고구마를 전달했던 기억이 나네.

몇년전인가 춘천에서 도균이와 대성이와 넷이서 만나 점심식사를 했었는 데 그뒤 춘천에서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네.


4년전인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삼성병원에 문병을 갔었지.

초등학교 동기와 함께 갔었는 데 나는 알아보는 것 같았는 데 다른 친구는 모르더군.

의사소통이 어려웠으니 얼마나 답답했었겠는가?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나중에는 내가 가도 알아보지 못하더군.

서울에서 아들이 있는 충주로 옮긴 후에는 자주 가지 못했네.

볼 때마다 증세가 악화되었지만 안타까운 마음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네.

회복이 힘들게 되자 여주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찾지를 못하다가

지난 8월말에서야 연식이와 상오와 같이 찾아갔었네.

그때는 여러 보조장치를 부착하고 있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었네.

이것이 우리가 살아서 보는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기적이라도 일어나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기도 힘든 상황이었네.

그런 모습을 잠깐 보고 돌아서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네.

그러다가 자네의 부음을 듣게 되었지.

빈소에 걸린 사진 속 모습은 건강하기만 한데....

이제 자네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고 말았군.


우리가 처음 만난 이래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는 좋은 길벗이었네.

장성한 후에는 각자 직장에서 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가끔씩이라도 만나면 늘 반가왔었네.

서로 마음이 통하고 이야기가 통하는 좋은 벗이었네.

知友와 함께 인생길을 걸을 수가 있어 걸어 온 길이 보다 즐거웠다네.

이제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할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헤어졌지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내 의식이 있는 한 자네와 함께 했던 추억은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을 것이네.

친구야 함께 인생 길을 걸을 수 있어 고마왔다.

이제 이 세상에서 꿈과 좌절과 즐거움과 괴로움과 육체의 고통을 모두 잊고 편히 쉬게나.


2017년 11월 7일 새벽 오랜 벗을 떠나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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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고3 소풍때 충열탑에서, 왼편이 필자, 오른쪽이 효섭군


1962년 초등학교 졸업때, 뒤의 안경쓴 분이 필자의 선친, 옆이 담임 선생님. 왼편이 이종승군, 중간이 필자, 오른편이 효섭군


원당초등학교 남자 교원들과 지역 유지, 맨 뒤의 왼편이 담임 이상배 선생님, 오른 편에서 두번째가 친구인 효섭군의 선친

아래 줄의 오른 편이 필자의 선친, 왼편의 안경쓴 분이 교장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