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때인 1959년 가오작리에서 적리라는 마을로 이사를 갔다.
가오작리는 군부대와는 거리가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군인가족이 몇가구 거주하기는 했고 도로에는 군용차들이 다니고 들판에서는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마을에서 군사지역임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우리집이 적리로 이사를 간 것은 그곳에서 가게를 열어 생활에 보탬을 받기 위해서였다.
적리에 조그만 가게가 딸린 집을 한채 마련하였다.
어머니가 이 가게를 운영하셨다.
우리집에 와서 초등학교를 다닌 이종사촌 누나가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 주었다.
두살, 네살된 남동생과 그위에 여동생 둘이 있었으니 어머니 혼자서 동생들을 돌보며 가게를 운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새로 이사를 간 적리는 가오작리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광덕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남쪽은 가오작리 북쪽은 적리였는 데 가오작리와 적리는 신병교육대(당시는 대대)를 중심으로 마을이 갈렸다.
적리에는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 데 광덕초등학교쪽 아랫마을은 정문쪽이었고 우리가 새로 이사를 간 곳은 후문쪽 마을인 윗마을이었다.
마을에는 가게, 술집, 당구장, 식당 등이 밀집되어 있었고 주말과 저녁 퇴근시간 이후에는 군인들로 북적거렸다.
부대 후문 마을은 조그마한 기지촌이었다.
밤이 되면 술집에서는 젓가락을 두드리며 부르는 유행가 가락이 흘러 나왔다.
마을에는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술집 아가씨들도 많았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낮에도 군인들이 북적거렸는 데 헌병들이 수시로 순찰을 돌았다.
군인들은 순찰도는 헌병만 보면 건물안으로 숨어 헌병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가끔 사이렌을 울리며 헌병 백차가 가면 그뒤에 별을 단 장군의 찝차가 따라갔다.
헌병 백차에서 사이렌이 울리면 군인들은 눈에 뜨이지 않도록 건물 안으로 피했다.
낮에도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군인들이 있었는 데(아마 업무로 나왔거나 휴가 중인 군인들이었을 것이다) 이들도 헌병만 보면 피했다.
어린 나는 헌병이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보면 군인들이 줄을 지어 개울가에 와서 세수를 했다.
추운 겨울에 개울의 얼음을 깨고 세수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군부대에는 온수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개울에서 세수를 했을 것이다.
부대 건물은 초가로 지붕을 해 이었고, 벽은 흙벽을 했던 것 같았는 데 아래는 겉에 회색 시멘트를 발랐고 위에는 백회를 발라
벽의 아래 부분과 윗부분의 색깔이 대조를 이루었다.
가끔 군인들이 밖에 나와 빨래를 했다.
군인들이 빨래를 하고 간 곳에 가보면 여기저기 비누조각들이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이 비누조각을 줏어서 집으로 가져 갔는 데 이것은 집에서 빨래를 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군부대 철조망 울타리 주위를 돌기도 했는 데 운이 좋으면 빈 소주병들을 줏었다.
이 소주병들을 고물상에 팔면 현금을 받게 되었는 데 이 돈은 우리 또래집단의 운영비(?)로 사용되었다.
군인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되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행군을 하거나 구보를 하는 모습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행군을 하는 군인들은 철모와 군복에 풀 등을 꽂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디론가 걸어서 이동을 했다.
도로를 달리는 차량은 거의 군용차였다.
운전훈련을 하는 차들은 20-30대가 대열을 지어 이동하였다.
맨 앞에는 선도라고 썼거나 "나를 따르라"라고 쓴 선도차가 갔고 그 뒤로는 군용 트럭들이 따라 갔는 데 앞자리에는 운전병과 교관 두명이 탑승하였다.
가물 때면 차가 간 뒤에는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났는 데 차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는 지나가는 트럭의 대수를 세어보는 것이 일이었다.
어떤 때는 트럭 적재함에 군인들을 가득 싣고 수십대가 대열을 이어 이동하기도 했다.
훈련장으로 이동하는 군인들이었을 것이다.
탱크가 이동을 할 때는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탱크를 보면 겁이 나서 어린 우리들은 탱크가 오면 도로 멀리 떨어져서 이동하는 것을 구경했다.
겨울에는 기동훈련을 하였다.
한쪽은 국군들이 입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반대 쪽은 북한군의 복장을 한 군인들이 편을 나누어서 훈련을 하였다.
기동훈련이 있을 때 밖에 나와서 보면 군인들이 산꼭대기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 데 연막탄이 터지고 총소리가 나는 등 전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때로는 정찰기가 날기도 했고, 쌕쌕이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기도 했다.
어떤 때는 도로를 완전히 통제하고 훈련을 했는 데 이때는 민간인들이 집밖에를 나다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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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주민들은 원주민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일부 있고, 가게나 식당 술집 등을 운영하고 있었고 군인가족들이 방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군인가족들은 사병들이 해온 땔나무를 이용해서 난방도 하고 취사도 하였다.
그런데 땔나무에 옻나무가 섞여서 이것을 땐 군인가족이 불옻이 올라서 고생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하였다.
집에는 울타리가 없거나 있더라도 엉성한 나무 울타리 뿐이라 다른 집의 사는 모습이 훤하게 들여다 보였다.
은애 아버지라는 분은 술주정뱅이였는 데 술을 먹으면 식구들을 들볶았다.
은애 아버지의 술주정이 시작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구경을 했다.
은애 아버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 데 은애 엄마를 폭행하려 하면 아줌마들이 말렸기 때문에 폭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동네 아줌마들이 있으면 은애 엄마는 지지 않고 같이 맞고함을 질렀다.
때로는 대낮에 군인가족 여자들끼리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대의 머리를 끄들고 싸웠는 데 여자들의 싸움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특징이었다.
때로는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서로 엉겨서 싸움을 했는 데 옷이 찢기고 가슴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3학년때 가오작리에 살 때는 같은 학년 또래들이 5-6명이 있어 몰려 다니며 놀았는 데 적리로 이사를 온 후로는 사는 마을이 다르기 때문에
이들과 어울리지를 못했다.
대신 새로운 관계망이 형성되었다.
같은 학년으로는 기범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학년이 다른 진행이 기행이 형제와 어울려 놀게 되었다.
나와 기범이 학년이 높은 진행이와 한 학년 밑인 기행이가 또래집단이었는 데 다른 친구가 더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개울 가운데의 섬에다 본부를 만들었다.
우리보다 학년이 높은 진행이가 리더였다.
쑥과 버드나무 등을 베어서 움막을 만들고 개울에서 미역을 감기도 하고, 모래사장이나 자갈밭에서 놀았다.
아마 군인들 흉내를 내며 병정놀이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여름에 큰 홍수가 나고 우리들의 아지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어 우리는 산과 들을 누비며 놀았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군인들이 훈련받거나 행군하는 모습, 술집에서 젓가락을 두드리며 부르는 유행가 가락 소리
도로를 달리는 군용차 행열과 때로는 탱크의 굉음 등이었다.
이 마을에서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구멍가게가 잘안되었는지 다음해 봄 아버지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고 우리집은 동면 지석리
괸돌(고인돌)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어 부대 후문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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