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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전라감사"

초등학교 3-4학년때의 일이다.

"전라감사"라고 불리우는 분이 이웃마을에 살고 있었다.

"전라감사"라면 예전 왕조시대에 있었던 벼슬로 알고 있었던 나에게 "전라감사"라는 호칭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시 그분의 나이가 30대 중반이었으니 왕조시대에 감사벼슬을 지냈을 리가 없다.

어린 나에게는 헷갈리는 호칭이었다.

 

전라감사라는 분은 키가 큰 편이었는 데 한쪽 다리를 심히 절었다.

똑바로 걷지를 못하고 한쪽으로 몸을 기우린채 절둑대며 걸었다.

입은 항상 반쯤 벌린채였고 사람들이 아는척을 하면 크게 입을 벌리며 씨익 웃었다.

속된 표현으로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끼리 나누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라감사는 물론 위의 인물의 별명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알 것이다.

전라감사라는 분이 원래부터 장애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정상적인 평범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2차대전 말기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대에 끌려 가서 국내 어디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수영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절벽 위에서 물에 추락하여 바닥에 머리를 부딛히며 크게 다쳤다고 한다.

그때의 부상과 후유증으로 자세가 삐뚜러졌고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지능도 퇴화가 되었다고 한다.

다래끼를 어깨에 메고 삐뚜러진 자세로 절둑대며 걷다가 사람들을 보면 입을 크게 벌리고 히죽 웃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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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을 하여 역사를 배우며 전라감사라는 분은 일제의 식민통치의 희생자라는 것을 알았다.

타의에 의해 징집되었고 훈련을 받다가 부상을 입은 것이다.

독립된 내나라를 가진 현재라면 당연히 보훈대상자가 되어 충분하지는 못하다라도 나라의 돌봄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병역자원으로 용도가 없어진 그를 치료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해방이 된 후 일제에 의해 희생된 분들은 한국과 일본 어느쪽에서도 관심과 돌봄을 받지 못했다.

훈련중에 다친 청년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고 "전라감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2차대전 종전 70년을 맞이해서 일본의 총리 아베가 담화를 발표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사죄를 하지 않았다. 현란한 말로 무어라 지꺼리기는 했지만 과거의 불충분한 사과를 계승한다고 했을 뿐

자신의 언어로 사죄를 하지 않았다.

아베는 한 술 더떠서 전후세대는 과거 전쟁과 식민통치 등 과거사에 대해 사죄를 할 책임이 없다고 했다.

결국 과거사에 대해 사죄를 하지 않고 넘어가겠는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수백만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제로 군대와 보국대라는 노역에 동원되었다.

또 수많은 조선의 처녀들이 정신대라는 성노예로 일제의 군부에 의해 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권유린과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질병으로 증거인멸의 과정에서 죽어갔고 살아 돌아온 소수도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평생을 굴곡지게 살아야 했다.

일제는 수많은 우리 백성들을 침략전쟁에 끌고 가서 희생시키고서도 형식적인 유감 표명 수준 이상의 반성을 하지 않았다.

그려면서 성노예가 된 정신대를 군이 강제 동원한 적이 없다는 뻔뻔스러운 말을 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민간업자에게 동원되었을 뿐이라는 해괴한 소리를 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전라감사"와 같은 분들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7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일제에 의해 심신의 상처를 받은 분들은 한많은 삶을 살다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일제가 진정성 있는 사죄를 하지 않는 한 일제의 폭압에 의한 희생자들의 한은 그대로 이 땅위를 맴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