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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어린 시절의 단상 - 시력검사

어제(5월 27일) 큰처남 내외를 모시고 양구를 다녀왔다.

큰처남은 막내 여동생인 아내를 돌보고 교육시켰기 때문에 아내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팔순이 다되어 가는 큰처남이 서울 집에서 지내는 것이 답답했는지 26일날 내외분이 춘천 우리집을 방문하였다.

춘천에 사는 출가한 큰딸과 둘째 처형의 아들 가족들이 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조카의 세 아이들(8세, 5세, 3세)의 즉석 재롱잔치는 모두를 즐겁게 했다.

맨 위가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이고 그 밑이 남자아이들인데 아주 활달한 아이들이었다.

교회에서 배운 것과 TV에서 본 것을 공연하였는 데 아직 두돌이 되지 않은 막내의 누나와 형 따라하기는 모두를 즐겁게 하였다.

 

27일 새벽에 학곡리 농장(?)에 모시고 갔다.

옥수수, 마, 마늘, 감자, 고추 등 농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여드렸다.

쑥, 돌나물, 두룹, 취 등 밭 주변에서 半自然 상태로 자라는 작물들에 대하여서도 설명을 하였다.

큰 처남은 퇴직후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는 우리 부부의 모습에 아주 만족하는 것 같았다.

아욱과 상추 치커리 등  채소를 수확하여 집으로 왔다.

아침 식탁은 아주 풍성했다.

갖 수확하여 온 상추, 치커리, 곤드레, 씀바귀, 쑥갓 등의 쌈채소류와 아욱국으로 차려진 상이었다.

전에 수확하여다가 저장하여 두었던 두룹과 도토리묵까지 나오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양구로 가기로 했다.

양구는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곳이어서 고향으로 생각하는 곳이다.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곳이 모교인 양구중학교였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박수근 미술관을 관람하고 민통선 북쪽에 있는 두타연을 관광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준비를 마치고 양구로 출발하였다.

소양댐이 준공된 후 양구에 가려면 홍천으로 우회를 하거나, 구불구불한 오음리 길을 통해서 갔기 때문에 길도 험하였고

3시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어 아주 불편하였다.

그러다가 양구선착장에서 소양댐 선착장까지 여객선이 운항하여 시간이 단축되었지만

양구 읍내에서 선착장까지 버스로 가서 배를 타고 소양댐 선착장에 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춘천 시내로 왔기 때문에

불편이 많았다.

'90년대 중반에 추곡 터널이 뚫려서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지만 배후령이라는 험한 고개를 넘어야 했고

소양댐을 끼고 구불구불 커브길을 운전하여 양구에 갔기 때문에 불편함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몇년전 배후령 터널이 뚫리고 웅진리와 석현리 쪽에도 몇개의 터널이 뜷리면서 도로가 거의 직선화되었다.

과거에 3시간 가까이 걸리던 것을 1시간도 걸리지 않고 양구로 가게 되었기 때문에 교통이 엄청 편리해졌다.

거리와 시간이 단축된 다른 도로나 철도처럼 주변 경관을 보는 즐거움이 사라지게 된 것이 편리함의 댓가일 것이다.

 

박수근 미술관은 양구에서 태어난 화가 박수근(1914-1965)을 기리는 미술관이다.

박수근 화백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뛰어난 화가였다.

아이를 업은 여인, 빨래하는 여인 등 주로 주변 인물들의 생활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처음 건립될 때는 전시관이 하나였지만 작품을 더 수집하여 제 2 전시관이 건립되었고, 박수근 화백과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장이욱, 이응로, 천경자 화백 등의 작품을 더 수집하여 제 3전시관을 건립하여 미술관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박수근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양구의 친구들에게 추천을 받은 막국수를 잘한다는 집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고대리에 있는 뽕막국수라는 곳이었는 데 가 보니 최근에 막국수에서 냉면으로 업종을 바꾸었다고 한다.

조금은 실망을 했지만 냉면으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주인의 이름을 보니 기억나는 이름이었다.

인사를 하고 고향을 물어보니 내 기억이 맞았다.

나보다 5년 선배인 해창이 형을 보면서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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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초등학교 3학년때 아버지의 전근으로 양양군 현북면에서 양구군 남면 광덕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양양에서 다니던 학교는 분교장으로 학교 지붕이 초가였고, 흙벽을 한 건물이었다.

교실은 마루가 아닌 흙바닥이었고, 통나무를 쪼개서 낮은 것은 의자고 높은 것은 책상인

공원의 벤치 모양의 책걸상에서 공부를 했다.

광덕초등학교는 함석으로 지붕을 하고 송판을 잇대어 벽을 만든 건물이었다.

흙바닥이 아닌 마루바닥의 교실이었지만 책걸상이 없어서 마루바닥에 엎드려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해 말 책걸상이 들어와서 책걸상에 앉아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 걸어서 15분쯤 거리가 되는 가오작리라는 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농촌이 모두 그렇듯이 집들은 모두 초가였고 대부분의 집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오래 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같은 학년의 또래가 몇명 있었고, 가까운 이웃마을에 사는 녀석들까지 합하여

7-8명의 또래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놀았다.

산과 들과 개울이 우리들의 놀이터로 자연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마을에는 드물게 중학생들도 있었는 데 해창이 형은 중학생이었다.

아주 키가 커 보였고 물지게 같은 것을 지고 돼지 먹이로 쓸 잔반을 모으러 동네 집집을 다니던 모습이 기억난다.

하루는 해창이 형이 나를 보고 시력검사를 해주겠다고 하였다.

시력검사를 하려면 한쪽 눈을 가려야 한다고 하며 한쪽 눈을 가렸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곳을 가르키며 잘 보이느냐고 했다.

순진한 나는 정말로 시력검사를 하는 줄 알고 잘보인다고 했다.

그랬더니 형은 "너 눈이 참 좋다"라고 하면서 나머지 눈도 검사를 하겠다고 하였다.

시력검사(?)를 하고 돌아다니는 데 보는 사람들마다 웃는다.

영문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보시고 화를 내신다.

형은 숯검뎅이를 손에 묻혀서 시력검사를 한다고 하면서 얼굴에 온통 숯검정칠을 한 것이다.

해창이 형은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친 것이다.

다음날 해창이 형이 잔반을 모으러 물지게를 지고 우리집에 왔다.

어머니는 해창이 형에게 무어라고 꾸지람을 하시는 것 같았다.

 

몇년후 중학교에 갔을 때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을 본 후 그동안 만난적이 없었다.

첫발령을 받고 양구중에서 근무할 때 형의 조카를 가르친 적이 있지만 형은 외지에 나가서 생활했기 때문에 만난적은 없었다.

50년의 시간, 반세기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우연히 식당 주인과 손님의 신분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해창이 형은 수원에서 30년이 넘도록 식당을 하다가 몇년전부터 고향 마을이 가까운 고대리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니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형은 악의 없이 장난을 쳤을 것이고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 데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장난으로 피해를(?) 당했으니 기억하는 것이고....

우리 식구들과 형과 나는 당시의 이야기를 하며 크게 웃었다.

오랫만에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의 여행을 한 것이다.

형도 나이를 먹은 모습이 역력하였다.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며 서로 건강하게 지내자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뽕잎 가루를 섞어서 면을 뽑아 만든 냉면은 아주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