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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우물의 추억

우리 몸의 70% 정도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물은 생명유지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 요소이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며칠을 살지 못하고, 물이 없으면 생물도 살 수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물이 있었다.

아니 사람은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살았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물을 구하기 쉬운 강가였다.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이야 수백 km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다가 사막 가운데에 도시를 만들기도 하지만 불과 한 세기전만 하여도

물이 없는 곳에 도시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다.

 

우리나라의 마을을 보면 어디든지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강에서 물을 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지하수를 이용하였다.

지하수를 이용하면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고, 집 가까운 곳에서 물을 구할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

내가 어려서 살던 마을에도 물을 길을 수 있는 우물이 있었다.

 

 

비를 맞지 않게 지붕이 있었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르레를 설치하여 물을 긷기 편리하게 한 경우도 있었지만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위의 사진에서처럼

우물에 빠지지 않게 해놓은 시멘콩크리트 틀에 몸을 의지하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렸다.

 

어머니들이나 처녀들이 우물물을 길어 왔다.

동이에 물을 길어 이고 다녔는 데 물동이를 잡지 않고 걷는 것은 곡예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때로는 아이들이 바케쓰(양동이)를 들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긷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때 심부름으로 가끔씩 물을 길러 간 적이 있었다.

어른들이나 형들은 물을 길어 물지게로 한번에 두통식 운반하기도 했지만 나는 어렸기 때문에 양동이에 물을 길어 집으로 운반했다.

 

문제는 물을 길을 때였다. 틀에 의지하여 물을 긷는 데 물이 담긴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것은 어린이의 힘으로는 벅찬 것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줄을 당겨 두레박을 끌어 올리는 데 잘못하여 줄을 놓쳐서 두레박을 빠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두레박을 물에 빠뜨리면 어머니나 마을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었다.

 

1년에 한번 두번 정도 우물 청소를 했다.

대개 봄인 5월 상순과 가을인 9월 하순쯤 우물 청소를 했다.

마을 청년이 팬티바람으로 두레박 줄을 잡고 우물로 들어갔다.

깊은 곳은 몇m 깊이로 만약 어린이들이 빠진다면 혼자 힘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아래로 내려간 청년은 바닥에 쌓인 뻘흙 등을 두레박에 담아 올려보냈다. 

아이들이 부주의로 빠뜨린 두레박도 몇개씩 건져 올렸다.

 

우물가에는 물을 긷기 위해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또, 물을 길어 채소를 씼기도 하고, 간단한 빨래를 하기도 하였다.

우물가는 정보가 교류되는 장소였다. 아낙네늘은 채소를 씼으며,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이러쿵 저러쿵 남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어느 아가씨가 바람이 났다는 등, 어느 집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다.

사랑방이 남자 어른들의 사교장이고, 안방이 할머니들의 사교의 장이라면 우물가는 젊은 여인들의 사교의 장이었다.

겨울 철에 청년들은 어느 부잣집 머슴방에 모여서 서리해 온 닭을 잡아먹으며 밤늦게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60년대가 되면서 집집마다 펌프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도와 혼동하여 펌프에서 퍼올리는 물을 보고 수돗물이라고 하기도 했다.

집집마다 마당에 펌프를 설치하였다.

펌프가 설치된 집은 더 이상 우물을 이용하지 않았다.

우물은 미처 펌프를 설치하지 못한 집에서 이용하다가 점점 사용자가 줄어들고 나중에는 메워져서 없어졌다.

 

1960년부터 3년간 살았던 고인돌 마을에는 마을 한 가운데에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샘물이 있었다.

샘물 위에 시멘트로 틀을 만들어 놓았지만 두레박을 아래로 내려 물을 긷는 것이 아니고 바가지로 퍼내면 되었다.

한편으로는 물이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어 이곳에서 채소 등을 씼기도 하고 빨래를 하기도 했다.

30여호쯤 되는 집들이 이 샘물을 이용했다.

물은 아주 맑고 깨끗했고 물맛이 좋왔다. 샘물 안에는 가재와 물고기가 살았다.

 

'63년에 남면 창리로 이사를 갔는 데 이곳에는 펌프가 설치되어 있어 우물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우물에 대한 추억은 없다.

'65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춘천으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이사를 오기까지 두달 정도 작은고모댁에서 학교를 다녔는 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수도를 이용하였다.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물이 나오는 데 편리하기도 하였지만 매우 신기하였다.

우리집이 이사를 오면서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사온 집은 지금 법원과 병무청 사이에 있는 마을이었는 데 아직 도시화가 되지 않은 시골 모습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이사를 하면서 전기 가설을 하였다.

이곳에는 아직 우물이 있었다. 어머니는 우물을 길어다가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하셨다.

이사를 오던 해가 가물어서 우물에 물이 잘고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가장 일찍 일어나서 물을 길어 오셨다고 한다.

그해 여름 마당에 펌프를 박았다. 펌프질을 하면 맑은 물이 쏟아져 나왔다. 우물물을 길어다가 절약하며 쓰다가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무척 좋왔다.

2년후쯤 우리가 사는 곳에도 수도가 들어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는 우리집 길 건너 고구마 밭에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시골 마을에서 도시화가 된 것이다.

우물은 수도가 들어오면서 식수와 생활용수 공급의 기능을 상실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고, 사람들은 우물에 쓰레기나 돌들을 투기하였다.

어느해인가 기능을 상실한 우물을 메워지고 우물을 돋보이게 하였던 틀도 치워지고 비를 가리던 건물도 도르레도 치워졌다.

 

그래도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물이 있는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80년대에 와서는 아무리 시골이라고 해도 특별히 보존을 하는 곳이 아니면 우물이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민속촌 같은 곳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박물관의 유물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흐르는 물을 길어다 써야 하는 불편함을 덜어주고, 깨끗한 식수를 공급해 주던 우물은 펌프와 수도에 밀려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우물물을 길어다 먹던 세대의 추억 속에서나 존재를 하고 있다.

이 세대들이 모두 떠나면 생활 박물관의 유물이 되어 전설로 다음 세대에 이야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