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5학년때 4.19혁명이 6학년때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당시 농촌에는 라디오가 있는 집이 극히 드물었고, 국한문 혼용을 하는 신문을 초등학생이 읽을 수가 없었으니 시골 초등학교 학생이 4.19와 5.16의 현장을 목격할 수도 없었고, 뉴스매체를 통해 접할 수도 없었다.
농촌에 사는 초등학생이 접할 수 있는 정보란 어른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들은 것과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들은 것, 친구들을 통해서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으며 대부분 단편적인 정보였을 것이다.
또 50년도 더되는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라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필자가 오늘 5.16이 일어난 날이라 어린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글을 쓰지만 지금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상당 부분이 훗날 학습되거나 덧붙여진 것들이 뒤섞여 있어 순수한 당시의 기억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한계가 있을 것이다.
1960년에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에는 4월 1일에 새학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가 있던 3월 15일은 4학년때였고, 4.19혁명이 일어난 4월은 5학년때였다.
대선이 있기 전인 2-3월의 기억이다.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기붕 후보의 벽보가 곳곳에 붙어 있어 정부통령 선거가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부모님께 대통령은 이승만을 부통령은 이기붕을 뽑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라고 말하였다.
필자가 1980년 오공헌법을 제정할 때 홍보라는 명목으로 반상회에 참석하고 가정방문 홍보를 다니도록 동원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학교에도 어린이들을 통해 정부통형 선거 홍보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것이다.
당시 대통령 후보는 기호가 2번이었고 부통령 후보는 1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담임 선생님은 "Ⅱ∙Ⅰ로 통일하자"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대통령은 이승만을 부통령은 이기붕을 찍으라고 부모님께 이야기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수업시간을 이용하여 이승만 대톨령의 업적과 대통령을 계속해야 하는 당위성이 교육되었겠지만 기억나는 사항은 없다.
기억되는 것은 정부통령 모두 자유당의 후보인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투표하라는 내용뿐이다.
그러나 선생님이 조병옥박사도 훌륭한 분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난다.
아마 선생님도 상부의 지시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선거홍보를 하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20년후인 1980년 철이 들면서 선생님이 부정선거 홍보를 한 것을 비판한 제자는 5공화국 헌법 제정 홍보를 위해 동원되었다.
선거를 앞둔 어느날 밤이었다.
영화상영을 한다고 했다. 마을 공터에 어른들과 어린이들이 모여 영화를 관람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였다. 흑백영화였는 데 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은 기억할 수 없고 단편적인 몇장면만 생각난다.
일본군이 군악대를 앞세우고 행진하여 오는 데 청년 이승만이 군중들 사이에서 뛰어나가 북을 걷어차는 모습, 감옥에 갇혀 있는 장면, 대통령이 되어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 모습(아마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등 단편적인 몇가지만 생각이 난다.
그리고 영화 끝부분에 이기붕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승만대통령의 일대기와 정부 홍보를 하는 것은 정부통령 선거를 위한 홍보작업이었을 것이다.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일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큰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셨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술잔을 기우리시며 시국에 대한 토론을 하고 계셨다.
당시 농사를 지으시던 큰아버지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선거에 대해 규탄을 하셨다.
3인조니 5인조니 하는 공개투표를 성토하셨다.
기억나는 한마디는 "신익희씨가 왜 죽었는지 알아"라는 말씀이었는 데 전후 이야기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큰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아버지는 누가 들을까봐 큰아버지에게 주의를 주시는 것 같았다.
얼마후 어른들이 서울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경찰이 총을 쏘아서 희생되는 학생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어린 마음에도 학생들이 희생된다는 데 대해 불안한 하였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시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인근 학교인 원당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우리집 담벼락에 정부의 담화문 벽보가 붙었다.
어른들은 담화문을 읽고 학생들의 시위에는 공산당의 사주가 있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통령이 물러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시위대가 이기붕의 집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어보니 수박이 나왔다고 하며 어른들이 흥분해서 말씀하셨다.
그때까지 냉장고를 본 적도 없었고 여름도 아닌데 수박을 먹는다는 것이 생소하게 들렸다.
국민들이 흥분한 것은 당시에는 보리고개가 있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은 데 냉장고에 수박을 넣어 놓고 먹는 것이 사치스럽게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보영화가 상영되었다. 아마 4.19에 관한 영화였을 것이다.
기억나는 장면은 이승만대통령이 병원을 방문하여 부상당한 학생들을 위로하는 장면이었다.
어린 마음에서였지만 정부통령 부정선거때문에 학생들이 다쳤는 데 당사자인 대통령이 학생들을 위문하고 학생들이 대통령을 만나는 장면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리라.
여름이 되었을 때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회의원 입후보자들의 사진이 포함된 벽보가 담벼락에 붙었다.
기억나는 후보는 민주당의 김재순과 예비역 대령이라는 임규호,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는 성현경(이름이 확실하게 기억되지 않음)이다.
선거운동원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선거운동원들은 우리집에도 들렸다. 성현경후보의 운동원들은 할머니에게 무어라고 성후보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임규호 후보의 친구라는 분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었는 데 이분은 임후보 선거운동을 했다.
괸돌 마을에서 기와집말을 건너가는 다리 밑에서 야간에 임규호 후보의 유세가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서 어른들을 따라 유세현장을 가보았다.
마이크를 잡은 임후보는 무어라 열변을 토했지만 60만 대군을 40만으로 감군하겠다는 말 한마디만 기억난다.
아마 국방비를 줄여서 복지예산을 늘리겠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얼마후 대통령 윤보선과 국무총리 장면이 선출되었다는 벽보가 담벼락에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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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이 되고 얼마가 지났을 때였다. 어느날 친구인 정효섭이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켰다고 했다.
나는 혁명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을 공회당의 게시판에는 벽보가 붙었다.
아마 담화문이었던 것 같은 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최고회의 의장이라는 장도영장군의 사진이 크게 부의장이라는 박정희 장군의 사진이 작게 게시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갑자기 학교 분위기가 바뀌었다. 선생님들이 단체복을 입고 명찰을 달았다.
담임 선생님은 혁명공약을 외우라고 했다.
"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1조부터 이러한 임무를 끝내고 군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6조까지 뜻도 모르고 외워야 했다.
얼마나 반복해서 외웠는지 55년이 지난 지금도 1번과 2번은 정확하게 외울 수 있고, 그 뒤의 조항도 대략적으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선생님은 내핍생활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물자를 아껴 쓰는 것이 내핍생활이라고 했다.
군사혁명의 필요와 정당성에 대한 교육도 있었겠지만 기억나는 내용은 없다.
민주당 정부가 부패하여 혁명이 필요했다고 했는 데 당시 선생님에게서 들었던 것인지 훗날 다른 자료로부터 접한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마을 공회당 앞의 게시판에는 수시로 벽보가 붙었다.
재건이라는 구호가 넘쳐났다. 재건복을 입은 요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재건에 관한 노래와 근로를 독려하는 노래도 배웠다.
하루는 전교생이 원당리에 있는 연대로 들어갔다. 연병장에는 어른들과 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병장 가운데에 설치된 무대에서는 혁명을 계몽하는 연극이 공연되었다.
짙은 화장을 하고 분장을 한 배우들이 연극을 하였는 데 아마 혁명정신을 고취하고 5.16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코미디언들이 왔던 것 같다.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혁명정신이 투철한 아내가 남편의 나태함을 꾸짓는 내용이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굽실대며 "부인각하, 부인선생님"을 복창하여 폭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혁명정신을 계몽하는 연극이 끝나고 이어서 6.25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연극이 공연되었다.
연극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전투 장면은 볼만했다.
모의총에서 소리가 나며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아마 적군을 몰아내는 승리의 장면이었는지 모두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훗날 교사로 발령받아 근무할 때 선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5.16후 학교 교무실 분위기가 살벌하였다고 한다.
젊은 초급장교들이 학교에 와서 교사들에게 혁명공약을 외워 보라고 해서 외우지 못하면 면박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말기인 '7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교감선생님이 교과서(무슨 과목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를 보라고 한다.
혁명공약이 나와 있었다. 교감선생님은 6번을 보라고 했다.
6번의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소장파 군인들이 합법적인 민간인 정권을 몰아내고 구악을 일소한다고 했지만 자신들도 부패하여 그들 중 다수가 부패 혐의로 법정에 섰다. 또 혁명과업을 완수하면 군 본연의 위치로 돌아간다고 하였지만 역사를 왜곡해 가면서까지 군사정권의 장기화를 시도하였으나 10.26으로 장기집권의 막이 내렸다.
그러나 민주화의 열망을 짓밟으며 다시 군사정권이 출범하였고 국민들의 저항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져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고 수평적 정권교체도 이루게 되었다.
4.19와 5.16은 근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큰 사건이지만 당시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훗날 당시의 단편적인 기억과 공교육을 통해 학습한 내용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한 정보와 자료를 통해 그 역사적 의미를 내 수준에서 이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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