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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거대한 유리벽으로 둘러 싸인 방 속에서 사는 삶

 

컴 세대가 아닌 우리는 컴퓨터에 대하여 미숙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컴세대가 아니어서 컴퓨터가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직업상 컴퓨터를 사용하여야 하니 업무에 필요한만큼만 배워서 이용하는 데 자꾸 새로운 버전이 나온다.

이것을 배우는 것도 버거운 형편이다.

 

어제 근무하는 학교 교무부장이 전화를 했다.

오늘 학교에 출근하여 공문서를 편철하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공문을 접수하여 홀더에 순서대로 묶어두었다가 색인목록을 수기(手記)로 작성하였었다.

이제는 전자문서로 작성하게 되어 있어 컴퓨터 상에서 분류 저장을 하여야 한다.

 

재작년까지는 문서행정으로 들어가서 필요한 공문을 찾아서 출력하고,

기안한 문서를 결재를 받아 발송하면 되었는 데 이제 문서의 분류와 저장까지 컴퓨터에 하게 되었다.

작년부터 시행하였지만 작년까지는 전과 같은 방법을 병용할 수도 있었는 데 올해부터는 전면시행이 되었다.

 

석달 전인가 문서를 한번 편철한 적이 있었지만

다시 할려니 모두 잊어 버려서 결국 후배의 도움을 받아 문서를 분류하고 편철하였다.

이제 업무에 있어서 후배를 가르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후배에게 묻고 도움을 받아

겨우 내 앞가림을 하야 하는 그런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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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정산을 하는 데 세금을 절약하려면 여러가지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금융기관에서 인증을 받으면 이런 서류를 안내어도 된다. 예를 들면 카드 사용 증빙서 등이다.

그래서 농협에 가서 인증을 받고 국세청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연말정산을 클릭하였다.

그랬더니 내가 쓴 카드 사용 내역과 금액이 날짜별로 쭉 뜨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가족들이 치료한 내역과 약국에서 약을 탄 것도 모두 내역이 떴다. 약국 이름도 앞의 두글자까지 떴다.

 

또, 보험료를 낸 내역도 모두 떴고...

나이스(교육행정 전산망)에 있는 내 인적사항을 클릭하면 월급여 내역과 세금을 낸 내역이 모두 화면에 뜬다.

 

인증을 받았으니 인터넷 뱅킹을 하여 돈을 보낼 수도 있는데(이것도 처음으로 이용하였음)

오늘 클릭을 하여보니 통장에 입출금한 내역이 모두 뜬다.

편리는 해졌다.

 

그러나, 이제 국가가 마음만 먹으면 나의 모든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또, 아주 똑똑한 해커가 있어 방화벽을 뚫는다면 누구의 정보든 다 알아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한 개인의 인적사항은 물론 금융정보와 건강상태까지 알아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려면 개인의 신상을 정부 전산망에 모두 공개하지 않을 수 없고

행상이나 노점상을 하지 않는 이상 장사를 하려면 카드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교회나 사찰 등 종교단체들도 기부금 공제로 세금을 절약하기 위한 신도들의 민원을 외면할 수 없으니 기부금 영수증을 발행하여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국가는 각 교회나 사찰의 인적규모와 재정규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종교단체의 현황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약국이나 병원 모두 의료보험 환자를 받아야 하니 의료기관도 거래 내역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

 

이제 전자 정부의 위력을 노숙자나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피해갈 수는 없다.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최소한 주민등록은 있어야 하니 대한민국에 사는 누구도 전자정부의 위력 아래 자신을 맡기지 않을 수가 없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것처럼 악의를 가진 독재자가 다스리는 국가라면 이제 개인을 통제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전자정부의 구현은 개인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거래를 투명하게 하며, 세금을 정확하게 징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악용이 되면 개인의 신상이 모두 드러나게 되고 이것이 악용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크게 되었다.

 

이제부터 한 개인개인은 거대한 투명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속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 보여지는 삶을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2007. 12. 31. 춘천고등학교 제 40회 동창회 카페에 올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