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2월 26일) 저녁 TV채널을 돌리다가 채널 A를 틀게 되었다.
대담이 나오는 데 어느 진행자가 문재인의원이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하지 않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관람했다고 말했다. 문의원의 부모님이 1.4후퇴 흥남철수때 부산으로 내려 오셨고 문의원의 성장과 정치적 고향이 부산인데 국제시장을 관람하지 않고 왜 다른 영화를 관람했는가를 정치적 스펙트럼에 비추어 토론을 하고 있었다.
대담자에 따라 큰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분도 있었지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분도 있었다.
이 토론을 시청하며 나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필자가 운영하는 블로그 친구분이 내가 올린 댓글에 답글을 올리며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꼭 관람하라고 하였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아침에 아내를 재촉하여 CGV 영화관에 가서 ‘국제시장’을 관람하였다.
영화 국제시장은 ‘해운대’로 히트를 친 윤제균 감독이 제작한 영화다.
‘국제시장’은 윤덕수(황정민분)라는 한 노인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생활사에 그치지 않고 시대를 관통하는 근대사의 질곡을 담고 있다.
주인공 덕수보다 10여년쯤 후배인 필자는 주인공이 살아온 시대와 필자가 살아온 시대가 대부분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그 삶의 역정과 시대적 배경과 상황에 대해 공감할 수가 있어 마치 내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영화는 6.25동란(우리가 어려서 어른들에게 들었던 한국전쟁의 통상적인 표현)시기의 1.4후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과 UN군이 반격하여 초산과 혜산진까지 북진하여 통일을 앞두고 있었는 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전선이 밀리게 되어 후퇴를 하게 되었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너머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까지 북진했던 국군과 미군은 강원도 동해안으로 후퇴할 수 있는 길이 막혀 흥남항을 통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흥남항은 후퇴하는 국군과 미군, 군수장비, 피난민이 얽힌 아비규환의 생지옥과 같았다.
군병력과 장비를 실으러 온 미군 수송선에 우여곡절 끝에 피난민들이 승선하게 되고 그밖에 해군이 동원한 선박까지 합하여 10만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흥남에서 거제도로 철수하게 된다. 주인공 덕수의 가족은 빅토리아호에 승선하는 데 배에 오르다가 덕수가 업고 오던 막내 여동생 막순이를 놓치게 된다. 아버지는 막순이를 구출하러 하선한다.
덕수에게 "네가 가장이니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피난선을 타고 거제도를 거쳐 부산에 온 덕수네 가족은 부산 국제시장을 헤매다가 고모를 만나 정착하게 된다.
아버지도 없이 어머니와 삼남매가 부산에서 살게 되는 데 고생의 연속이다.
동생을 업고 학교에 등교하고, 미군차를 따라다니며 기브미 초코렛을 외치기도 하고, 구두닦이를 하기도 하고 온갖 역경을 겪으며 덕수네 가족은 부산에서 힘든 타향살이를 한다.
「나도 미군차를 따라다니며 “기브미 껌”을 외쳤던 기억이 난다.
미군 쓰리꼬다(3/4톤 작은 트럭의 당시 호칭)가 나타났다. 미군들이 타고 갔는 데 아이들이 차를 따라가며 ‘기브미 껌’을 외쳤다. 미군들이 무엇인가를 차뒤로 던져 주었는 데 애들이 이것을 줏었지만 동작이 느린 나는 줏지를 못했다. 집에 와서 부모님께 이야기를 하니 절대로 미군차를 따라다니며 무엇을 달라고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셨다. 나는 그뒤 미군차를 따라다닌 적은 없었다.
내가 보낸 유년기는 덕수의 가족과 비교할 수가 없다. 부모님 밑에서 자랄 수 있었고 꿀꿀이죽도 이야기만 들었지 먹어본 적이 없다. 피난을 다니면서 질병으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고 하지만 아기때라 기억에 전혀 없고 고생은 부모님의 몫이었다.」
영화 속의 부산의 피난살이가 공감이 가는 것은 그 시대가 나의 어린 시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덕수는 자라서 청년이 된다. 그러나 맏이로서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부산에서 막노동을 하던 그에게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달구가 서독 파견 광부로 가자고 한다. 집에서 반대를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남동생이 서울대를 합격하였는 데 학비가 없는 것을 본 그는 서독 광부에 지원을 해서 서독으로 간다.
서독의 탄광 1천미터 지하 막장에서 목숨을 걸고 석탄을 캐는 일을 한다.
막장으로 내려가며 “살아서 지상에서 만나자”라는 말은 인상적이다.
덕수는 파독 간호사로 온 영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영자 역시 맏딸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서독에 와서 시체를 닦는 것 같은 험한 일을 하고 있다. 덕수가 일하는 탄광에서 메탄가스 폭발사고가 나게 되고 낙석에 다친 덕수와 달구는 갱내에 갇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조되게 된다. 이때 영자는 덕수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계약기간이 만료된 덕수는 영자와 이별을 하게 된다.
귀국을 하여 보니 덕수가 보낸 돈으로 가족들은 집을 마련하고 생활이 안정되어 있었다.
몇 달후 임신을 한 영자가 귀국을 하게 되고 둘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꽃분이네 가게를 하던 고모가 돌아가시고, 술주정뱅이 고모부는 가게를 처분하려 한다.
덕수는 해양대학에 합격하였으나 여동생의 결혼과 가게 인수 때문에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덕수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구인 달구와 같이 월남에 기술자로 가게 된다.
전쟁터에서 일을 하는 덕수는 베트콩의 폭탄 테러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베트콩에게 포위되어 살해되기 직전 해병대원들을 만나 구출되기도 한다.
적의 점령지에서 선박으로 철수하기 직전 정보를 제공했다는 것 때문에 살해의 위협을 느낀 주민들이 함께 떠날 것을 요구하고, 흥남에서의 일을 생각한 덕수는 그들을 데리고 간다.
배에 승선하는 과정에서 오빠가 데리고 오던 여자 아이가 물에 빠지게 되고 덕수는 동생을 생각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뛰어 들어 여자 아이를 구출했으나 다리에 총탄을 맞고 다리를 절게 된다.
「월남전은 나에게도 기억이 생생하다. 고1때인 1965년 춘천역에서 화천 오음리에서 훈련을 마치고 떠나는 파월장병들을 환송하러 나갔다. 우리는 맹호부대 노래를 부르며 파월장병들을 환송하였다. 몇 년 후에는 군에 먼저 입대한 동기들이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당시 부사관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였던 같은 마을에 살았던 중학교 동기 승균이는 고엽제 후유증 때문에 보훈병원에 입원하여 있다. 병욱이는 월남전 당시 노무자로 월남에 가서 일을 했다. 그는 월남에 갔다온 공로로 가산점을 받아 개인택시 면허를 받아 40년 가까이 개인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월남전 이후 중동에 많은 노동자들이 파견되어 일을 했다. 많은 친구들이 중동에 가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이것을 밑천으로 작은 사업을 벌려 생활하고 있다. 서독, 월남, 중동의 이역땅에서 땀을 흘려 일을 한 것은 바로 우리세대의 일인 것이다. 이분들 덕분에 우리나라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이분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덕수는 귀국하여 부산에서 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려 간다.
1985년 이산가족 찾기의 열풍이 분다. 덕수는 아버지와 여동생을 찾기 위해 신청을 하고 극적으로 미국에 입양되어 살고 있는 여동생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 하던 어머니는 막내딸을 만나고 세상을 떠난다.
「내 경우 양구가 외가인데 6.25전에는 양구가 북한땅이었기 때문에 두 외삼촌이 북으로 갔다. 나는 가끔 외삼촌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시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는 평생 북에 있는 두 남동생들을 보고싶어 하셨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그리던 아들과 동생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마 외삼촌들이 6.25 전쟁의 고비를 넘기고 생존하셨다고 해도 이제는 연로하여 모두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다」
덕수의 자식들은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어 독립하여 나가고 덕수는 고집쟁이 노인으로 늙어 간다.
덕수에게 국제시장 꽃분이네 가게는 단순한 생계수단인 사업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북한에 두고 온 아버지가 국제시장 꽃분이네 가게를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이름을 바꾸지도 않고 가게를 팔지도 옮기지도 않으려고 한다.
그는 한국인 고등학생들에게 인종차별의 봉변을 당하는 외국인들을 편드는 데 이 역시 월남에서 물에 빠진 여자아이를 구출하던 것과 같이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사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제삿날 온 가족들이 모이게 되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를 열창하는 손녀의 노래 소리에 울컥한 덕수는 혼자 다른 방으로 가서 회상에 잠긴다.
상상속에 나타난 아버지에게 독백을 한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약속을 지켰습니다”
덕수는 “이제부터 네가 가장이다”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목숨을 걸고 탄광 막장에서 일을 했고, 생사의 갈림길이 상존하는 월남의 전쟁터에서 일을 했다. 장남이기 때문에 가장이 되어야 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했다. 덕분에 동생들을 순탄하게 살았고 자식들도 큰 고생을 하지 않고 자랐지만 고집쟁이가 된 덕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영화는 전쟁과 가난의 시대를 겪으며 살아온 한 개인의 생활사이기에 앞서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이기도 하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 맏아들이며 남편이며 아버지인 한 남자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의 삶을 통해 우리나라 근대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필자에게 더욱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주인공이 살아온 시대가 내가 살아온 시대이기도 하고, 비록 삶의 형태와 고통의 정도가 내 경우와는 다르지만 주인공의 삶의 모습이 많은 부분 내가 살아온 모습과 공통점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침에 영화를 보고 와서 하루 종일 영화의 장면들과 그 의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아 그 감동을 부족한 표현력의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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