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1990년 강원일보에서 발행하던 월간 태백 6월호(IMF때 폐간되었음)에 실렸던 글을 2004년에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
우리 또래들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얘기 중의 하나가 "쓸만한 녀석들은 6.25때 다 죽고 찌스러기들만 남아서 속을 썩인다"라는 말이었다.
태어나서 첫돌도 되기 전에 6.25를 만났거나 피난 가다가 혹은 피난지에서 태어난 우리 또래들은 6.25의 생생한 경험자요 피해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전염병 등으로 우리 또래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피난 갔다가 돌아왔을 때 어린애들 옷이 잘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전란 중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또래들도 많았다.
전쟁 전후의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절 영양 섭취를 잘하지 못해 키도 제대로 크지 못했고, 대다수가 거친 음식을 먹고 누더기 옷을 입었던 빈곤한 생활을 했던 우리들은 확실히 6.25의 피해자이나 6.25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이 점이 6.25를 겪은 우리 부모님, 형님의 세대와 같은 6.25의 경험자, 피해자이면서도 6.25는 먼 역사 속의 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는 전후 세대와도 상통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어느 세대보다 부모님께 고생을 많이 시켰던 불효의 세대가 우리 세대이기도 하다.
걸음마도 못하는 어린애를 업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고, 6.25의 더위와 1.4후퇴의 매서운 추위와 싸우며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어린 자식의 주린 창자를 채워주어야 했던 부모님의 고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잘 먹이지도 못하고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자식에게 약 한첩, 주사 한대 쓸 수 없었던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6.25' 그 큰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몸으로 겪었고 그 피해를 누구보다도 크게 입었으면서도 그 고통과 아픔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6.25를 먼 역사 속의 사건으로 이해하면서도 6.25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또래의 공통적인 실상이라고 생각된다.
15년전(지금 시점으로 29년전)의 일이다. 지금은 미국에 가 있는 친구 P군을 만나러 서울에 사는 그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의 군 복무 관계로 3년만에 만나게 되어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갔는데 집안의 공기가 이상하였다. 물주전가가 찌그러져 있는 것도 이상하였다.
P군은 그의 이웃 아주머니의 소개로 맞선을 본 아가씨와 결혼하려는 것을 어머니가 반대하여서 젊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답답하다고 내게 하소연하였다.
P군의 어머니는 P군을 어떻게 해서 살린 녀석인데 어미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나에게 신세 한탄을 하였다.
6.25 피난지에서 P군이 전염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 데 약 한알 제대로 구할 수 없어서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주사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침 피난민 중에 간호원 출신의 아주머니가 있어 주사를 놓을 수 있게 되었는 데 문제는 증류수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궁하면 통한다는 속담처럼 P군의 어머니는 증류수룰 만드는 지혜를 생각하여 내셨다고 한다. 남비에 물을 끓여 뚜껑에 맺힌 물방울을 모아 이것을 증류수로 하여 주사약과 혼합하여 주사를 놓아 P군을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댜. 그렇게 해서까지 살려 놓았는 데도 어머니의 뜻에 반하여 자기 멋대로 결혼을 하려 한다고 어머니가 분개한 나머지 주전자로 방바닥을 쳐서 그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의 말씀은 어떻게 기른 아들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누구의 입장에 서지도 못하고 아무 말도 할 수없었던 그때의 상황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 사건 역시 6.25의 그림자가 우리 생활 속에 깊숙히 드리우고 있었던 한 예일 것이다.
어렸을 때 우리 또래의 대부분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어렵게 자라야 했던 것도 6.25의 후유증이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학년의 인원이 제일 적었던 것, 중고교의 입학 시험에서 선배들의 경우보다 경쟁율이 훨씬 낮았던 것도 6.25때 우리 또래들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6.25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을 들으며, 내가 겪은 6.25 체험의 형식으로 씌여진 교과서로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랐던 것도, 부모님께 들은 피난갔던 이야기를 자신이 기억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던 것도 우리 또래의 공통되는 경험이다.
또, 미국이 우리의 은인으로 우리를 참담한 전쟁에서 구해준 천사의 나라로 생각하며 동경했고 국제정세를 동서냉전의 시각에서 판단했던 것도 우리 또래의 공통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전세대들로부터 전쟁의 참화를 모르는 철부지 전후세대로, 전후세대로부터는 흑백논리와 반공이데오르기의 굳어진 껍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직된 사고의 소유자로 간주되고 있다.
이들 모두가 6.25의 사건이 1953년 7월 27일 휴전과 더불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어른들이 "이 아이들이 자랐을 때는 평화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얘들은 군대에 안가도 되겠지"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던 우리가 자라서 벌써 한세대 전에 군복무를 하였고 우리의 아들들까지 대를 이어 군에 다녀왔으나 아직도 통일은 멀게만 느껴지는 현실이니 분단의 아픔과 6.25의 비극은 대를 물려가며 계속되는 우리 민족이 언젠가는 벗어야 할 멍에인 것이다.
1990년 5월 작성, 2004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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