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나는 산 좋고 물 맑은 횡성군 갑천면에 있는 갑천고등학교에서 5년간 근무한 후 정선군 고한읍에 있는 고한여자중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지금은 카지노가 있는 고한은 당시에는 탄광경기가 정점에 달한 광산 도시였다.
개울에는 검은색의 물이 흐르고(실제로 물의 색깔이 검은 것은 아니고 바닥에 퇴적된 석탄 때문에 검게 보였음) 바람이 불면 석탄가루가 날려서 방바닥을 닦을 때면 탄가루가 까맣게 묻어나고 빨래를 밖에서 말릴 수 없는 그런 환경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지금 28세가 된 아들녀석이 하루는 그림을 그리면서 "아빠 물을 까맣게 칠을 할까요? 파랗게 칠을 할까요?"하고 물었던 곳이다. 녀석은 유치원 시절까지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살았기 때문에 물의 색깔에 대한 생각에 혼선이 와서 이런 질문이라도 하였겠지만 그곳에서 나서 큰 아이들은 개울물을 까맣게 칠한다는 것이 이해가 갔다.
3월 1일자로 부임을 하니 마침 해동이 되는 때였다. 길에는 탄가루와 진흙이 섞여서 질퍽대고,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실감이 되었다. 나도 장화를 한 켤레 사서신고 출퇴근을 하였다. 내가 근무하는 여중고는 언덕위에 있어서 탄가루 공해를 비교적 적게 받는 곳이었다. 바람이 부는 날 보면 아래쪽에 있는 고한 역 쪽에서 날리는 탄 먼지가 연기처럼 보였다.
둘째딸이 그때 막 돌을 지났기 때문에 교회 바닥에서 기어 다니곤 하였는데 예배가 끝나고 보면 흰옷이 까만 옷이 되었다. 교회는 바로 탄가루가 가장 많이 날리는 역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서 사찰을 보는 임집사님이 쓸고 닦고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곳의 봄은 녹아 질퍽대는 탄과 진흙이 죽 범벅이 되어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는 길바닥과 날리는 탄가루로 기억된다. 그래도 생명은 약동하여 새싹은 돋고 탄가루를 뒤집어 쓴 나무에서도 신록은 돋아났다.
여름은 탄가루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주 지내기 좋은 곳이었다. 선풍기가 없이도 살 수 있었고, 모기가 없어서 모기장이 필요 없었다. 만항이라는 함백산 밑에 있는 지역은 1000m가 넘는 곳인데 짧은 팔 옷을 입을 수 있는 기간이 며칠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계절은 겨울이었다. 1983년 겨울은 무척 추웠다. 상수도 수원이 달리던 시절이라 겨울에는 웬만한 곳에는 수도가 나오지를 않았다. 우리는 먹을 물만 겨우 나오는 수도에 의지하여서 살아야 했는데 이는 그나마 낮은 지대에 살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이었다.
고마운 것은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터가 있었는데 개울가였다. 개울물이 모래 속을 흘러나와서 솟아나는 곳으로 탄가루가 걸러져서 맑은 물이 나왔다. 가물어도 이곳만은 계속 많은 양의 물이 솟아 나와서 인근 주민들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리어커에 빨래를 싣고 와서 빨래를 하였다. 아주 고마운 샘터였다.
탄광이 개발되면서 갑자기 인구가 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주거환경은 아주 열악하였다.
삼척탄좌 등 큰 탄광의 광원들은 광산에서 제공하는 사택(부엌 1칸, 방 2칸)에서 살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의 달동네에서도 보기 힘든 좁은 스레트집에서 생활을 하여야 하였다. 집집마다 화장실은 생각할 수 없었고 여러 세대가 공동변소를 사용하였다. 우리가 살던 곳에도 공중변소가 한 동 있었다.
그래도 두 칸이어서 남녀가 유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곳 겨울은 무척 추웠다. 아마 평균 -10도 아래로 내려갔을 것이고 추울 때는 -20도 밑으로도 내려가는 날씨였다. 큰 변기통을 묻은 공중변소는 여러 사람이 사용하게 되니 많은 양의 분뇨가 모이게 되었다. 겨울이라 똥은 쌓이는 대로 얼고, 그 위에 다시 쌓이고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탑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원뿔 모양의 탑이 만들어졌는데 높이가 1m이상은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는 엉덩이를 찌를 정도로 높아졌고 그러면 나는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나가서 탑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였다. 처음에는 두어 달 쌓인 공든 탑(?)을 무너뜨렸는데. 시간이 가면서 탑이 쌓이는 주기가 단축되었다. 한 달에서 보름으로, 보름에서 열흘로 이렇게 주기가 짧아지면서 탑은 엉덩이를 찌르게 높아졌고 그때마다 탑을 무너뜨려서 엉덩이를 보호하여야 하였다.
탑을 무너뜨릴 때마다 파편은 튀고. 그 주기가 5일쯤으로 단축되었을 때 봄이 되어 탑이 쌓이지 않게 되었고 읍사무소에서 분뇨를 수거하여 가서 더 이상 똥 탑과의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84년도 겨울에는 지레 겁을 먹고 식구들을 집이 있는 춘천으로 보냈고, 마침 관사가 건립되어 관사에서 생활하게 되어 주거환경은 좋아졌지만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교사는 당시에는 극히 일부였다.
'85년에 춘천으로 옮기게 되어 2년간의 고한생활은 마무리되게 되었다.
그 후 13년만인 '98년에 사북여중에서 연구발표회가 있어 출장을 갔던 길에 고한을 잠시 지나면서 전에 근무하였던 학교에도 들르게 되었다. 이때는 카지노 공사가 시작되었고, 탄광은 삼척탄좌 하나가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고 역저탄장에도 방진망을 설치하고 물을 계속 뿌려서 탄가루는 거의 날리지 않았고 물도 제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2001년 아들과 같이 다시 고한을 지나면서 예전에 살던 곳을 찾아 갔는데 이미 우리가 살던 집은 모두 없어졌고 그 위치도 기억하기 힘들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곳에서 근무하며 지냈던 생각을 하면 열악한 환경에서 학교에 다니던 제자들에게 좀더 따뜻한 정을 베풀지 못하였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
2004년
'살며 생각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촌놈의 실수 이야기 (0) | 2013.08.22 |
---|---|
짝퉁이 판을 치는 시대 (0) | 2013.08.21 |
<내가 겪은 6.25/ 6.25동이> "똑똑한 녀석들은 6.25때 다 죽고..." (0) | 2013.08.20 |
닭장 속의 사회 (0) | 2013.08.20 |
제자의 결혼식 주례사 (0) | 2013.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