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촌놈이다. 흔히 촌놈하면 무엇인가 한쪽이 모자라고 남에게 잘속는 어리숙한 사람을 일컫는다. 또는 시골에 사는 사람을 비하하여 촌놈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촌놈이라는 말에 남다른 향수를 느끼며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아주 산골이다. 그리고, 강원도밖으로 한번도 주민등록을 옮긴적이 없이 태어난 6.25직전부터 지금까지 극히 일부 기간(대구로 피난간 기간 등)을 제외하고는 강원도에서 살았다. 강원도에서도 고등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00군 00면 00리에서 살았으니 나야말로 순진짜 촌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남은 꿈은 한적한 시골에 가서 집을 짓고 약간의 농토에 채소 등 농작물을 가꾸며 사는 것이고, 기회가 된다면 청소년들에게 기초 한문 등을 지도하고 어린 꼬마들에게 구연동화를 하여 주면서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야망이(?) 있다면 내가 퇴직한 후 사는 동리에서 이장에 출마하여 동리 이장을 한번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에 이장님 하면 굉장히 우러러 보이고 존경스러웠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본론에서 조금 벗어났는 데 촌놈인 내가 실수한 이야기를 고백하고자 한다. 1. 전등불을 끄지 못하는 고등학생 1965년 중학교를 졸업한 시골소년은 큰 야망(?)을 품고 대처인 춘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일대 용단을 내리셔서 온 가족이 춘천으로 이사를 하기로 하였는 데 그때까지 두달 가까이 고모님 댁에서 머물게 되었다. 고모님과 고모부와 고종사촌 동생들과 내가 함께 단간방에서 복잡대며 생활을 하고 있는 데 하루 밤에는 화장실에를 가게 되었다. 마루에 전등불이 켜져 있었는 데 고모께서 불을 끄고 들어오라고 하셨다. 못끈다고 할 수도 없고 대답을 하고는 전등불만 쳐다보고 서있었다. 고모님은 빨리 끄라고 독촉을 하시고 나는 대답만 하고 쩔쩔매며 서있고, 이런 난처한 상황이 조금 지났는 데 갑자기 고모부께서 껄껄 웃으시는 소리가 났다. "동현이 녀석이 불을 끌 줄 모르는 가보다. 영호야(나보다 생일이 두달 늦은 동생) 네가 가서 불을 꺼라" 동생인 영호가 나와서 스위치를 비틀어 불을 껐다. 방안에서는 고모부와 고모님 그리고 막내 동생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때 당황했던 기억은 4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2. 수세식 화장실에서 당황하던 모습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로 기억된다. 어느 곳에 갔다가 처음으로 수세식 화장살에를 가게 되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들어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용변을 보고 줄을 잡아당겼는 데 물소리가 나면서 변기로 물이 흘렀다. 물을 멈추게 하고 나가려는 데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줄을 잡아당기니 물은 계속 나오고... 물을 멈추지 못하여 당황하던 나는 할 수없이 물이 흐르는 것을 방치하고 도망치듯 박으로 나왔다. 한참이 지난 후 궁금하여 다시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신통하게도 물은 멈추어 있었다. 3. 봉지에 담긴 녹차를 까서 물에 탄 대학생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용약 서울로 대학시험을 보러 갔다가(시험 보는 첫날 처음으로 친천집 안방에서 TV를 보았는 데 첫 뉴스에서 마주친 인물이 유명한 김신조였다) 보기 좋게 미역국을 먹고는 1년을 무위도식하며 재수라는 것을 하고 지냈다. 한번 실패한 쓴 경험때문에 다시 도전할 용기를 내지 못한 나는 내가 사는 지방에 있는 국립대학으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입학초에 바둑에 심취되어 바둑을 두러 기원에를 자주 갔는 데 하루는 기원에서 녹차를 주었다. 나는 찻잎이 들어 있는 봉지 속의 차를 뜯어서 타먹는 줄 알고 찻잎이 든 봉지를 뜯어서 이것을 잔속에 넣었다. 그리고 차를 마시려는 데 무언가 부자유스러웠다. 옆의 사람을 컨님하여 보니 봉지를 잔 속에서 잘 흔들어 주어 찻물이 우러나게 하여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를 버릴 수도 없고 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찻잎을 불어 가며 차를 마셨다. 그리고 눈을 숨겨 가며 찻잎을 건져 내어 버렸다. 4, 洋食을 먹을 줄 모르는 시골 교사 처음 교직에 발을 들여 놓고 11년간을 시골에서 근무를 하였다. 탄광촌에서 근무를 할 때이던 30대 중반에 교육대학원에를 입학을 하였다. 급우들과 교수님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 데 양식으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양식을 먹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철저하게 벤치마킹(?)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나보다 젊은 교수가 이를 눈치채었다. 그분이 남이 알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양식을 먹는 법을 시범을 보이며 가르쳐 주었다. 지금도 나는 새로운 변화에 늦게 적응을 하는 편이다. 결혼만 우리 또래 평균보다 일찍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만 조금 빨랐을 뿐 모든 것이 느리게 가고 있다. 운전면허도 남보다 늦게 땄고, 차를 운전하는 것도 또래보다 한 20년은 늦었고, 손전화(핸드폰)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많은 부분에서 느릿느릿 가고 있다. 다행인 것은 느릿느릿하다 보니 이익을 볼 때도 있는 것이다. 한때 직업을 바꾸려고 하였던 때도 있었는 데 결단과 실행이 조금 느려서 기회를 놓진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직업을 바꾸었다면 지난 IMF때 또한번 직업의 전환을 강요 받았을 것이다. 거듭되는 실수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고 느림 속에서도 정해진 길을 가고 그러면서 세월은 가고 세대는 바뀌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 |
2003. 10.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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