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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점심 도시락에 대한 추억

요즈음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간단한 것은 빵과 우유를 주는 것이고 그보다 조금 등급이 높은 것이 도시락을 제공하는 것이다.

도시락도 여러 등급이 있어 간단하게 끼니만 때울 수 있는 것이 있지만 값이 비싼 것은 잔치 음식수준인 것도 있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점심을 해결하는 길은 도시락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혹 매점이나 학교 앞 가게에서 군것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우리세대에서 가게에서 자주 군것질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때는 수업이 일찍 끝나 도시락을 지참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학년이 높아지면 오후에도 수업이 있어 도시락을 싸가지 않으면 점심을 굶어야 했다.

학교에 등교할 때는 그날 시간표의 책과 준비물 외에도 도시락은 꼭 챙겨야 할 필수품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로 기억된다.

오후에 수업이 있었는지 점심시간이 되자 애들이 도시락을 꺼내놓고 밥을 먹는다.

나는 학교 구내에 있는 관사가 집이라 도시락을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애들이 도시락을 먹는 것이 부러웠다.

나는 어머니를 졸라 도시락을 가져 갔는 데 네모난 모양의 도시락이 아니고 아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반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곧 도시락에 흥미를 잃고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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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때 양구로 전학을 온 후로는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도시락을 지참하고 등교를 하였다.

3학년때는 책보에 책과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여학생들은 책보를 한손으로 받쳐 들고  다녔지만 남자애들은 책보를 허리에 차고 다녔다.]

집에 돌아올 때면 빈도시락에 들어 있는 반찬통과 젓가락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덜그럭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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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은 간편하고 내용물이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도시락의 내용물은 빈부의 차이가 났다.

첫째는 밥이 쌀밥이냐 잡곡밥인가이고, 두 번째는 반찬이 무엇인가이다.

잘사는 애들은 쌀밥에 반찬으로는 멸치볶음이나 계란말이를 싸오는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은 장아찌를 싸왔다. 내 도시락은 보리밥에 장아찌 반찬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도시락 반찬은 정해져 있었다.

장아찌인데 재료는 무, 오이지, 씨레기, 마늘쫑 등으로 다양했지만 어쨌든 장아찌 한 가지가 10년 가까운 내 도시락의 단골 메뉴였다. 어쩌다가 콩장(콩자반)이나 고춧잎 무침을 싸가는 경우도 있었다.

중학교때 우리반의 한 녀석이 가끔 멸치볶음을 반찬으로 가져 왔다. 그 녀석의 반찬이 무척 부러웠었다.

 

고2때 Y는 아버지가 어느 기관의 장이었는 데 Y는 계란부침을 밥위에 얹어와서 먹었다.

계란부침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도시락 반찬으로 김치를 잘싸가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반찬을 담을 마땅한 그릇이 없었다.

지금처럼 커피 병이 있었으면 좋왔을 터인데 입구가 넓은 병은 볼 수 없었다.

뚜껑을 닫으면 밀폐되어 쏟아지지 않는 반찬통은 없었다.

반찬은 도시락의 한모퉁이에 있는 작은 반찬통에 담았다.

도시락 뚜껑이 밀폐되지 않으니 한모퉁이에 있는 반찬통에서 흘러나온 물은 도시락 밖으로 흘러 가방이나 책을 적셨다.

많은 가방들이 도시락에서 흘러나온 국물 어서 얼룩이 져 있었다.

어떤 때는 책도 젖어서 얼룩이 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국물이 배어나오지 않는 마른 반찬을 싸갈 수밖에 없었고, 이 조건에 부합된 것이 장아찌였다.

겨울에는 밥 밑에 김치를 깔아 오는 경우가 많았다.

김치를 깔고 기름을 조금 뿌린 다음 밥을 덮어서 싸오는 데 이 경우도 도시락을 싸주시는 어머니들은 김치국물이 새지 않도록 세심한 신경을 써야 했다.

4교시 수업시간에는 난로위에 도시락을 데워야 했다.

주번은 도시락을 데우는 것이 일이었는 데, 도시락을 자주 바꾸어 쌓지 않으면 밑의 것은 타고 위의 것은 덮혀지지를 않아서 찬밥 그대가 되기 때문이다.

4교시 수업시간 교실은 온통 김치와 기름냄새로 진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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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도시락 검사를 받아본 경험이 거의 없지만 ‘80년대 초까지 도시락 검사가 있었다.

쌀이 부족하여 혼분식을 하자는 취지였는 데 선생님이 도시락을 검사하여 쌀밥을 싸오는 애들에게는 주의를 주었다.

교사가 되어 담임을 맡다 보니 도시락 검사는 담임의 업무의 하나였다.

도시락 점검표에 날마다 아이들이 지참한 도시락 점검 결과를 표시하여 결재를 맡아야 했다.

어쩌다가 한달에 한두번 아이들이 점심을 먹는 것을 둘러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실장보고 적당히 표시해서 가져 오라고 했다.

 

필자가 ‘83년 탄광지대인 고한여중에 근무할 때 수업시간이나 체육시간에 쓰러지는 애들이 있었다.

쓰러진 애들을 부축해 오거나 업어다가 숙직실(보건실이 없었기 때문에)에서 안정을 취하게 하면 대부분은 회복되어 다시 교실로 돌아가 수업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병원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교감선생님(여자분)은 아이들이 점심을 거르기 때문이라고 원인 분석을 하고 다음해부터는 담임이 입회하여 아이들과 같이 식사를 하라고 했다.

교감선생님은 점심시간마다 교실을 순회하며 담임이 직접 중식 지도를 하는지를 확인하였다.

그래서인지 다음해에는 수업시간이나 체육활동 중에 쓰러지는 학생들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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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가난한 애들 중에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지 못하고 점심을 거르는 학생들이 있었다.

초등학교에서는 저소득층 아동들에게 ‘60년대 초에는 옥수수 죽을, 중후반에는 옥수수 빵이나 빵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식빵 중독 사건이 난 후 빵을 주는 제도가 사라진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가 하면 식생활이 나아지면서 아이들의 편식문제도 사회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결식 아동 문제와 편식 문제는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고 이들을 지원하는 최선의 방법이 학교 급식이라는 논의가 있게 되고 초등학교부터 학교 급식이 시작되었다.

‘99년 다시 춘천중학교에 와서 근무하게 되었는 데 이때 중학교에도 급식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급식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위탁급식을 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급식 회사에서 음식을 만들어 싣고 와서 복도에 밥과 국과 반찬을 진열하면 점심시간에 애들이 식판에 밥과 반찬과 국을 떠와서 자리에 앉아서 먹었다.

후일 위탁급식은 직영급식으로 전환되게 되고, 학교 급식이 이루어지면서 도시락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도시락은 행사가 있을 때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나누어주는 음식이 되었다.

도시락은 학교 급식 이전 세대의 추억에 머물다가 그 세대가 퇴장하면서 잊혀져 가게 될 것이다.

훗날 20세기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점심 식사를 해결하던 방법으로, 20세기 학교 문화의 하나로 후세대에게 기억되게 될 것이다.

 

2012.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