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고장마다 그 고장을 대표하는 음식이 있다.
전주 비빔밥이라든가 안동의 간고등어, 포항의 과메기 등은 그 지방을 대표하는 먹거리다.
필자가 사는 춘천의 대표적인 먹거리는 막국수와 닭갈비다.
막국수는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Y자형의 국수틀로 눌러서 뽑아내어 삶은 국수인데 그 맛이 다른 종류의 국수에 추종을 불허한다.
원래 이 막국수는 메밀이 많이 생산되던 춘천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영서지방에서 즐겨 먹던 전통적인 향토음식이 대중화된 것이다.
춘천에는 많은 막국수집이 있고, 일년에 한번씩 8월말경에 막국수 축제가 열려 많은 식도락가들이 막국수를 즐기기 위해 춘천을 찾기도 한다.
또한 강원대학교의 함승시교수를 중심으로 메밀과 막국수의 영양학적 효능과 조리법 등에 대한 연구도 행하여지고 있다.
춘천의 명물 막국수와 닭갈비 덕분에 외제에서 방문하는 손님을 접대하는 데 부담이 적다.
한우로 유명한 도내 모지역에서는 손님 접대가 버겁다고 한다.
한우고기를 접대하여야 하는 데 접대하는 측에서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춘천을 방문하는 분들은 대부분 막국수와 닭갈비를 찾는 데 저렴한 가격으로 접대를 할 수 있어, 접대를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아 좋다.
강원도 영서지방에서 자란 우리 또래들은 막국수에 대한 鄕愁를 공유하고 있다.
필자가 성장한 양구지역 역시 춘천에 인접한 지역이라 막국수를 즐겨 먹던 곳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농촌의 일상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봄이 되면 농사 준비와 밭갈이와 밭곡식의 파종, 못자리 설치와 모내기, 논과 밭의 김매기, 수확 등으로 농민들은 가을까지 쉴 틈이 없었다.
농사일을 하면서 소도 길러야 하고, 돼지와 닭도 돌보아야 했다.
소를 기르는 것은 소가 먹을 풀을 산이나 벌판에서 베어다가 먹여야 하는 것으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추수가 끝나면 겨울동안 땔 나무를 해다가 쌓아야 한다.
추수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겨울 동리의 어른들이나 소년들은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간다.
산에서 나무를 하여 길까지 끌어 내린 후 소달구지 등에 싣고 오기도 하고, 그도 안되면 지게로 져서 운반을 하였다.
몇날 며칠동안 나무를 해다가 싸리나무 등과 같은 관목류는 단을 묶어 쌓아 둔다.
소나무나 참나무는 도끼로 나무를 쪼개어(장작을 핸다고 함) 쌓아 두고 겨울동안 취사와 난방을 하고,
소가 먹을 여물을 끓이는 데 사용했다.
땔나무를 쌓아 둔 다음부터 다음해 봄이 되기까지가 농한기였다.
이때 농민들은 이웃집으로 마실을 가기도 하는 등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처럼 전화로 미리 예고하고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 때나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 와 안방 앞에서 “누구 계시우”하면 되었다.
주인은 문을 열어 주고 이웃 사람은 집에 들어 와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아이들은 마땅히 갈 곳도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가 끼어들거나 질문이라도 하면 어른들에게 불호령을 듣기 때문에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당시 어른들의 이야기의 주제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왜정시대때 이야기, 인공시대(양구지역은 해방후부터 6.25전까지 북한 땅이었는 데 북한의 통치기간을 인공시대라고 하였음) 때 이야기, 6.25때 피난 이야기 등이었다.
어떤 어른들은 일정때 징용을 다녀온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반복하여 듣다보니 필자도 왜정시대때 이야기나 6.25때 피난 갔다 온 이야기를 하라면 할 정도로 이야기를 외우다시피 하게 되었다.
겨울이 되면 마을 청년들과 아저씨들은 연령대별로 모여 화투를 하였다.
당시에는 나이롱뻥과 섰다, 지꾸땡이라는 화투를 많이 하였는 데 우리 마을의 어느 청년은 자다가 벌떡 일어나 “장땡이다. 장땡이다”라고 외쳤다고 하여 화제가 된 일도 있다.
가끔 지서에서 순경들이 단속을 나오기도 하였지만 화투판은 겨울동안 계속되었으며, 대개 밤을 새우며 행해졌다.
겨울의 긴밤을 새우자니 배가 출출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화투판이 벌어질 때면 마을에는 막국수집이 생겼다.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겨울 한철만 부업으로 막국수를 파는 집이었다.
막국수집 안방에서는 화투판이 벌어지고
부엌에서는 큰 솥에 국수를 삶았다.
Y자 모양으로 된 국수틀에 메밀반죽을 넣고 국수를 눌러서 솥에다 삶아서 큰 대접에 담고는 양념 간장을 얹어서 김치나 동침이와 같이 상을 차려서 방으로 들여갔다.
그렇지만 이 막국수는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놀이판에 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선친께서는 교사의 신분상 마을사람들의 화투판에 낄 수 없는 형편이었음으로 나는 국수 한가닥 얻어 먹을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필자가 막국수를 즐기게 된 것은 성년이 된 이후였지만
어려서 본 막국수 삶는 광경은 하나의 추억으로 강하게 각인되어 막국수를 먹을 때마다 생각이 나곤한다.
이렇게 농촌에서 메밀로 만들어 먹던 막국수가 도시로 나와 사철 음식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이 되었다. 그리고, 메밀이 웰빙식품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며 막국수의 인기도 치솟고 있다.
며칠전 고등학교 동기회의 카페에 들어갔다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동기인 주영실군(서울에서 전자회사를 경영하고 있음)이 어린 시절 막국수에 대한 추억을 올려 놓은 것이 있어 이곳에 옮겨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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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국수 향수 주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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