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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단상

문둥이와 거지

 

어느덧 2008년도 저물어 간다.

이제 두밤만 자면 2009년 새해가 된다.

지나간 세월들을은 뒤로 밀려 나며 그 자취도 희미해 지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게 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시간도 반세기가 넘게 되었다.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떤 변화는 바림직한 변화요 발전이기도 하지만

어떤 변화는 붙들고 싶은 가치를 역사의 뒤로 사라지게 하기도 한다.

익숙한 것들이 우리도 모르게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이제는 우리가 따라잡기 힘든 새로운 것들이 나나타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뒤따라 가는 데 바쁘지만 그런대로 변화를 따라가는 시늉은 하였는 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나를 휙 스쳐 지나가는 변화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거나 아니면 무엇이 변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되었다.

 

컴퓨터를 사용하여 수업을 하는 데 가끔 프로그램이 말을 듣지 않아 어쩔 줄 몰라하면 학생들이 난리다.

저마다 코치가 된다. 마우스로 어디를 클릭하라. 무슨 프로그램을 다운 받으라 등등....

이럴 때는 누가 배우는 자고 누가 가르치는 자인지 경계가 없어진다.

컴을 사용하는 업무를 처리할 때 후배들이 먼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거나 아니면 물어서 처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아니 어떤 때는 후배의 지도(?) 하에서도 처리가 안되어 후배가 아예 내 컴 앞에 앉아서 대행을 해주기도 한다.

내 스스로가 이제는 뒤쳐져 가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야기가 곁길로 새었는 데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을 되살려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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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양구로 이사를 간 것을 초등학교 3학년 초여름이었다.

전에는 속초 노학동에 있는 설악국민학교(현 온정초등학교)에 다니다가

2학년 2학기때부터 양양군 현북면에 소재한 현성국민학교 장리분교에 다녔는 데 선친이 양구로 전근되게 되어

양구로 이사를 하였다.

 

양구로 이사를 오니 모든 것이 생소하였다.

군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길에는 군용차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격전지가 많은 양구라 산에를 가면 폭탄이 거꾸로 쳐박혀 있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산불이 나면 사방에서 폭탄이나 지뢰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학교 가는 길 왼편에 있는 사격장에서는 개울건너에 있는 과녘을 향해 실탄 사격훈련을 할 때면 콩볶듯하는 총소리가 들렸고 사격이 끝나면 사람들이 납을 캐러 간다고 사격장으로 가서 흙 속에 박힌 탄환을 캐어 이것을 녹여 납을 빼내어 굳혀서 팔기도 하였다.

나도 탄환을 캐러 친구들을 따라 갔었는 데 부모님의 지엄하신 엄명으로 다음부터는 고철을 줏으러 다닌다거나

탄환을 캐러 다니는 데는 얼씬도 못하게 되었다.

 

주변의 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산에 가면 해골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뒷산 진흙 구덩이 부근에서 사람의 뼈가 목격되기도 했다.

동네 형들이 늦가을에 머루나 가래를 따러 산에를 가기도 했는 데 나는 산이 무서워서 따라가지를 못했다.

아이들이 큰 산에를 가지 못하는 데는 문둥이에 대한 공포도 한몫을 했다.

 

문둥이(한센씨병 환자)에 대한 속설(대부분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지만)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문둥병에 걸리면 낫지 않고, 전염병이라는 데서 공포감은 더해졌다.

당시 문둥이들은 집단으로 유랑하며 민가에 와서 동냥을 해갔다.

문둥이가 오면 아이들은 숨고, 어른들은 얼른 얼마간의 쌀이나 돈을 주어 보냈다.

마을에 문둥이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으면 아이들은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공포감을 더하게 한 것은 문둥이가 병이 치료를 위해 아이들의 간을 빼먹는다는 이야기였다.

어느 마을에 어린이가 없어졌는 데 나중에 찾고 보니 간이 없는 상태에서 죽어 있더라 등의 소문이 떠돌았다.

아이들이 가고 싶은 산에 문둥이가 살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 산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문둥이가 어린이 간을 빼먹는다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잘못된 속설로 떠도는 이야기였지만

아이들에게는 공포감을 심어주는 데 충분했고 위험한 지역으로 몰려 가는 것을 예방하는 데 충분한 기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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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는 먹을 것이 귀하던 시대였다.

흉작이 들어 곡물가격이 뛰거나, 미국에서 480호 잉여농산물의 도입이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지연되면

국내에서는 식량파동이 일어났다.

춘궁기니, 보리고개니, 절량농가니 하는 말들이 회자되는 시대였다.

사회복지도 미비하던 시대이니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거지가 되어 구걸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는 마을에도 거지가 자주 왔다.

마음씨가 너그러우셨던 어머니는 거지가 구걸을 오면 우리도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약간의 쌀 등을 주어서 보내었다.

 

우리 마을에 통신 중계소로 사용하던 오두막집이 버려진채로 방치되어 있었는 데 이 집에 거지 일가가 입주하였다.

50대 중반쯤의 어머니와 30대 초반과 10대 중반의 두 아들로 이루어진 거지 일가였다.

모두 얼굴이 창백하고 누렇게 떠 있었다.

이들은 이웃 마을에 가서 구걸을 해다가 생활을 했다.

동리 사람들은 그들이 아편 중독자라고 했다. 아편에 중독이 되어 재산을 모두 날리고 거지가 되었다고 했다.

어떤 때는 우리 구멍가게에 와서 빵을 사먹기도 했다.

 

다음해 봄 이들 거지 일가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동리 아이들이 거지들이 살던 빈집으로 갔고, 호기심을 가지고 바닥에 깔았던 거적을 들추어 보았다.

10환짜리 동전 몇개와 셀 수 없이 많은 주사용 증류수 캡슐 깨진 것들로 바닥이 어지럽혀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지 일가는 마약중독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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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수준에 이르는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60년과 '61년에 양구 동면 월운리 저수지 공사가와 저수지 물을 공급하는 수로 공사가 있었다.

토목공사는 많은 고용유발 효과를 가져 온다.

당시 수로 공사는 곡괭이로 땅을 파고, 삽과 가래질로 흙을 퍼내는 인력으로 하는 공사였다.

외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대었다.

2년간의 공사가 끝난후 대부분의 인부들이 떠났지만 일부는 마을에 남아서 겨울을 지냈다.

인심이 후한 마을이어서 방의 여유가 있는 집들이 이들에게 방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공사후에도 떠나지 못하고 남은 이들은 나무를 해다가 판다거나 품을 팔거나 고철을 수집하여 생활을 하였다.

아이들은 남루한 옷을 걸쳤고, 잘 먹지를 못해 얼굴이 창백하였다.

30대 후반쯤 되었던 한 아주머니의 바짝 마른 몸에 임신을 하여 배만 부른 모습이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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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이 되며 동면 지석리에서 남면 창리(지금 국토의 정중앙이라는 도촌리의 옆 동리)로 이사를 했다.

집에서 읍내의 학교까지는 십리정도였는 데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농로를 따라 걷다가 제방위를 걸어 송청리 다리를 건너 국도를 따라 학교까지 가는 길을 매일 걸어 다녔다.

겨울에는 송청리 다리 밑에 거지 가족들이 여러 세대가 살았다.

이들은 다리 상판을 지붕삼고, 교각을 벽을 삼아 얼기설기 오두막을 짓고 겨울동안 다리 밑에서 생활을 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갈 때면 거지들이 밖에 나와 밥을 짓는 모습을 볼 때도 있었다.

토요일 일찌 귀가를 할 때는 거지들이 다리 밑 양지 바른 곳에 모여 앉아 짚으로 머리에 이는 또아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다리 밑 거지들은 동냥을 준 사람에게 또아리를 하나씩 댓가로 주었다.

또아리는 머리에 짐을 이고 다니던 여인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하루는 우리집에 거지 일가가 찾아 왔다.

엄마와 다섯살에서 10살 쯤된 세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거지 일가였다.

어머니가 밥을 차려 주자 이들은 밥을 허겁스럽게 먹었다.

허기가 가시자 세 아이들은 장난을 치며 놀았고, 어디서 구했는지 풍선을 가지고 노는 데

한개뿐인 풍선을 서로 가지려 싸움이 벌어졌고, 그러다가 작은 아이는 울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난장판을 이루자 미안한 생각이 든 엄마는 아이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고....

거지 일가의 소동은 이들이 떠나고서야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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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 도성에서도 거지때문에 골치가 아팠다고 한다.

거지들에게 베푸는 나라의 은혜라야 겨울에 옷을 해입으라고 폐기된 공문서인 종이를 나누어 주거나

천을 나누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영조는 겨울에 쌀이나 곡물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때 거지들은 겨울에는 주로 다리 밑에서 생활을 하였는 데, 다리 밑마다 꼭지라고 하는 두목이 있었고 나름대로 질서와 규율을 가지고 생활했다고 한다.

 

영조때 청계천의 하상이 높아져서 홍수가 빈발하자 이 흙을 퍼내는 대규모 준설공사를 하였는 데 이때 퍼낸 흙으로 두곳에 인공산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인공산에 구덩이를 파고 움집을 짓고 거지들이 생활을 했는 데 땅에 구덩이를 파고 산다고 해서 땅거지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생계를 위해 영조는 뱀을 잡아다가 팔 수 있는 독점권을 주었고 이때부터 뱀을 잡는 사람들을 땅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양구의 송청리 다리 밑의 거지들은 나름대로 거지의 전통을 이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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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빈층에 대한 국가의 복지혜택도 증가했지만 사업의 실패, 실직 등으로 인한 빈곤층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옛날의 다리 밑이나 땅굴은 지금 지하철이나 고시원 등으로 자리바꿈을 하였고, 가가호호 방문을 하며 먹을 것을 구걸하던 데에서 무료급식을 하는 곳으로 장소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먹을 것을 타인의 자비심에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먹을 것을 구걸하던 것이 지난 시대의 이야기가 되었던 것처럼 노숙자니 고시원이니 쪽방이니 하는 말들이 사라질 날이 오기를 염원한다. 

 

2008. 12. 30. 동창회 카페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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